공간시간-주윤균 그림 제공 포털아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은 가을보다 더 가을색이 완연합니다. 릴케의 시는 너무 깊고 웅장하여 오히려 한없이 단순하게 느껴집니다. 교과서에 실린 까닭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읽고 가을볕처럼 따사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허전한 정서를 마음에 아로새겼을 것입니다. 열정과 폭염으로 이글거리던 여름이 끝나고 드디어 만물이 속으로 영글어 결실에 이르는 장엄한 대자연의 서사를 릴케는 너무나도 짧고 선명한 이미지 속에 아로새겼습니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라는 선언은 결실과 심판의 중의적 시간으로 만인의 뇌리에 각인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틀만 더 따뜻한 남국의 날을 달라고 기도하며 그것을 통해 자연의 결실이 완성에 이르기를 희망합니다. 포도송이에 빗대긴 했지만 신의 경작물이 인간의 수확이 된다는 발견은 참으로 대단한 시적 영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의 경작물이 인간에게 일용할 양식이 된다면 인간은 어떤 식으로 결실에 이르고, 어떤 식으로 심판을 받아 신의 수확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자신이 아직 결실에 이르지 못한 인간임을 아는 인간은 스스로 집이 될 때까지 혼자 외로운 시간을 견디며 결실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래도록 혼자 깨어 있으며, 읽고, 긴 편지를 쓰고, 나뭇잎 떨어져 뒹구는 가로수 길을 불안스레 방황해야 합니다. 이토록 숭고하게 고뇌하고 방황하는 인간의 초상은 형벌의 바위를 날마다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면서도 신 앞에 끝끝내 당당하고자 한 시시포스와 다를 게 없습니다.
릴케의 ‘가을날’은 인생의 가을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의 인생은 지금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익어가고 있을까. 해시계 위에 신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장엄한 ‘때’가 다가오면 나는 어떤 결실로 구분되고 어떤 심판을 받을까….
릴케의 가을날은 가을이 올 때마다 우리를 스스로 심판하게 만듭니다. 아직 집이 없는 존재, 아직 집이 되지 못한 존재, 좀 더 아파하고 좀 더 깨어 있으라고, 그것은 우리를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거리로 내몰아 더욱 방황하게 만듭니다. 방황이라는 말을 얼마나 오래 잊고 살았나,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심판해야 할 가을날입니다.
박상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