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선발때 ‘열정’을 중시… 그들이 구글-애플 같은 기업 만들기를”
세계 유수의 대학평가에서 국내 대학으론 처음 30위 안에 진입한 포스텍의 개혁을 주도하는 백성기 총장. 그는 “남과 다른 기술을 만들어 내야 하는 글로벌 기업의 경쟁력은 결국 대학 교육에서 나오기 때문에 ‘수능 점수’로는 볼 수 없는 열정과 태도를 가진 학생들을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사진 제공 포스텍
포항시 남구 지곡단지 내 포스텍 교정은 주말인 데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잘 조성된 숲, 휴식 공간은 캠퍼스라기보다 연구기관 같았다. 이 조용한 학교에 소리 없는 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다. 대학 건물만 빼고 모든 것이 바뀌는 중이다.
포스텍은 개교 24년 동안 성장세를 이어왔다. 하지만 2007년 백성기 총장 취임 당시 여러 면에서 경쟁 상대인 KAIST에 밀린다는 평가를 듣고 있었다. 백 총장은 취임하자마자 철밥통이라고 간주되던 교수사회에 정년심사 제도를 도입하고 입학사정관제로 신입생 전원을 무시험으로 뽑는 등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대학 평가 소식을 듣고 기쁘셨겠다.
“더 타임스가 올해 평가기관을 큐에스(QS)에서 톰슨-로이터사로 바꾸면서 평가의 무게중심이 사회적 지명도, 양적 연구 성과에서 교육과 연구의 질적 성과로 바뀌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순위가 올라갈 것이라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백 총장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담겨 있었다.
평가방식 바뀌어 순위상승 기대, 30위권 진입할 줄은 생각도 못해
톰슨-로이터사는 종업원만 5만여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학술정보서비스회사. 이번 평가의 1위는 미국 하버드대였다. 이어 캘리포니아공대(칼텍) 매사추세츠공대(MIT) 스탠퍼드대 프린스턴대가 톱 5였다. 한국 대학은 KAIST(79위) 서울대(109위) 연세대(190위) 등이 200위 안에 올랐다.
“QS 평가는 교수 수를 따질 때 비전임은 물론이고 강사까지도 포함했는데 이번에는 전임교수로만 한정했다. 또 재정 규모를 학생 수로 나누면 1인당 학생에게 투자되는 액수가 나오는데 포스텍은 1억 원에 달했다. 칼텍이 2억6000만 원, MIT가 2억 원에 달한다. 그동안 5위에서 10위 사이였던 칼텍이 이번에 2위로 올라선 것도 평가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포스텍은 교육여건, 연구실적, 논문인용도, 기술이전도, 국제화 총 5개 부문에서 총점 75.1점을 받았다. 특히 평가의 핵심지표인 논문인용도가 96.5점으로 14위였다. 기술이전 성과도 존스홉킨스대 듀크대 KAIST와 함께 만점을 받았다. 연구를 통한 산업계 기여도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아무래도 포스코 같은 대기업 지원을 받으니 유리한 것 아닌가.
“사실이다. 당장 기업 이윤을 따지지 않고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은 포스코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포스텍이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질적인 성장을 도모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세계 수준의 대학이 되려면 할 일이 많다. 산학연구의 질을 더 높이고 세계적인 교수인력도 보강해야 한다. 28위에 만족하지 않는다.”
“대기업에서 일할 좋은 사원을 키워내는 것을 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세계적인 기업을 세우기 위해 도전하는 글로벌 인재를 키워야 한다. 한마디로 포스텍 졸업생 중에서 구글이나 애플 같은 기업을 만드는 창업자가 나와야 한다. 그동안 한국 기업은 선진국에서 기술을 베끼거나 사오는 방식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은 선진 기술을 잘 이해하고 응용하는 인력을 공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10여 년 전부터 이런 방식에 한계가 왔다. 기업들이 더는 외부에서 기술을 사올 수도, 흉내 낼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선진 기업들이 이제 다 경쟁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업 스스로, 아니면 대학과의 협력을 통해 신기술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남과 다른 것, 남이 하지 못하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방사광가속기 도입했을 때처럼 파격 지원이 글로벌 인재 만들것
“오랜 기간 교육현장과 연구현장에 있으면서 미래의 인재는 대학수학능력평가 점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열정과 창의성, 도전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는 그는 “신입생을 뽑는 데도 점수 뒤에 가려진 ‘스토리’를 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올해 신입생을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전원 무시험으로 뽑은 것이 그 맥락인가.
“그렇다. 고교 학교생활기록부나 수능 점수도 실력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지만 심층면접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실제로 수능 점수는 굉장히 불완전하고 변별력이 없었다. 더구나 한 해 입학생이 300명(박사과정 포함해 전교생 2000여 명, 교수 대 학생 비율 1 대 5.6)에 불과한 소수 정예를 지향하는 포스텍에서 1, 2점 차는 별 의미가 없다. 수학 과학에 대한 재능을 판별하고 이공분야에 대한 열정과 창의성, 도전의지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점수 뒤에 가려진 다양한 면을 봐야 한다.”
―결과는 어떤가.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학생들이 어느 해보다 진지하고 진취적이라는 게 교수진의 평가다. 졸거나 엉뚱한 일을 하는 학생이 많이 줄었다.”
백 총장은 과학고와 일반고 출신 학생의 실력 차도 결국 ‘태도’가 가른다고 덧붙였다.
“과학고 출신 학생은 선행학습이 잘되어 있어서 처음 1학년은 잘한다. 그런데 2학년 3학년 올라가면 일반고 학생이 더 잘하는 경우가 나온다. 사실 과학고 성적이란 것도 점수로 이뤄진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같은 점수, 같은 수준이라고 하면 특목고 보다 지방 학생을 뽑는다. 남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똑같은 결실을 보았으니 그만큼 잠재력과 성장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정관으로 선배 대학생을 포함한다고 해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학생은 학생이 더 잘 아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칼텍도 그렇게 한다. 사정관도 명망가가 아닌, 일선 수학 과학 교사나 전현직 교장을 위촉했다. 우리는 점수 그 자체보다 성적이 오름세인지 내림세인지에 주목하고 왜 그런 추이가 있었는지도 본다. 갑자기 집안환경이 어려워졌다든지, 교통사고 등으로 투병을 했다든지 하는 사정으로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가 다시 올랐다면 의지가 강한 학생으로 평가한다. 같은 수준이면 성장세에 있는 학생을 주목한다. 일례로 모 과학고에서 지원한 10명 중 5명을 합격시켰는데 학교 성적순이 아니었다. 그 학교 교장이 ‘잠재력이 있는 학생을 잘 뽑으셨다’고 하더라.”
―이번에 장관 딸 특별 채용 사건도 있었지만 우리처럼 인적 네트워크가 강한 사회에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 않나.
“학연이나 지연, 부모 배경 등에 따라 학생을 뽑을 경우 1차 피해자는 대학이다. 요즘엔 일부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은 과목을 가르쳤다고 그냥 점수를 주는 사례도 있고(수학2 같은 경우) 자기소개서를 남이 써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학교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이 고등학교에 가서 직접 만나고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문제를 풀게 해보면 감별해낼 수 있다.”
―교수정년심사제도도 도입했다. 반발은 없었나.
“많았다. 일부 교수는 ‘내가 최곤데 누가 누굴 평가하느냐’며 평가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다들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점에 공감했다. 지금은 누가 뭐래도 국내가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는 글로벌 시대 아닌가.”
―대학의 글로벌은 무엇을 의미하나.
“요즘엔 교수도 학생도 국경을 오간다. 이젠 한국 교수가 한국 학생만 가르치는 시대가 아니다. 이미 우리 기업이 글로벌화됐다. 포항의 중소기업도 세계를 상대로 하지 않고는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다.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전 세계 시장에서 부품을 팔고 산다. 대학이 글로벌 인재를 배출하지 않고서는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할 수 없다.”
“결국 교수 수준이 학교 수준”이라는 백 총장은 “해외에서 실력 있는 교수를 모셔오려면 임금체계를 유연하게 해야 하고 평가 시스템도 엄정해야 한다. 나 역시 이사회에 1년마다 평가를 받는다. 뭘 잘하고 잘못했는지 꼼꼼하게 적어내고 평가를 받은 후 연봉을 받는다”고 했다.
―(총장은) 개혁을 주도하고 성과도 나오니 연봉이 많이 올랐겠다.
“그건 비밀이다.” (웃음)
백 총장은 1971년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미국 코넬대에서 세라믹재료분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세계적인 학술지에 15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재료분야 권위자다. 우리나라 원자력연구소격인 미국 오크리지국립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가 1985년 포스텍 설립을 주도한 고 김호길 초대 총장의 권유로 귀국했다. 부모형제 모두 미국에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 총장이 미국 대학을 돌며 국내 교수진을 꾸렸는데 ‘조국에 가서 봉사하자’는 그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김 총장은 포스텍 설립 당시 높은 임금 대신 방사광가속기(용어 설명 참조)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했다.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가속기를 요구할 때 모두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박태준 설립자가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1994년 준공된 방사광가속기는 국내에 하나밖에 없다. 최첨단 시설은 최첨단 연구를 가능케 했다. 가속기는 오늘날 포스텍을 키운 동력이 됐다. 포스텍은 화학과 김광수, 생명과학과 남홍길 교수 등 국가과학자 2명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가장 많은 피인용 횟수를 기록한 바 있는 화학과 김기문 교수 등이 있다. 올 3월 포스텍은 ‘노벨상 사관학교’로 불리는 독일 막스플랑크 재단의 연구센터를 유치함으로써 그 위상을 인정받기도 했다.
한국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야말로 노벨상 수상자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교육분야는 난마(亂麻) 그 자체다. 백 총장에게 점수기계가 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고 하자 “좋은 대학을 선택하려고 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젠 좋은 대학 나왔다고 인생이 보장되는 시대가 지났다. 간판이라는 ‘환상’을 깨면 많은 것이 보인다. 이제 우리나라 대학도 수준이 높아져 아무리 나쁜 대학을 가더라도 학생이 공부할 것만 확실하게 있으면 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 어느 대학이건 외국 대학 나온 걸출한 분들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간판에 매몰되기보다 얼마나 호기심을 갖고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반대로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본인이 자신을 계발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방사광가속기::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전자가 원운동을 할 때 방출되는 전자기파(X선)를 이용해 연구와 응용에 활용되는 연구 시설. 가속기를 통한 연구 성과는 순수과학, 의학, 공학을 망라한다. 삼성전자 애니콜 휴대전화 고장 원인인 액정표시장치(LCD)와 회로 연결 부위 접촉 불량도를 밝혀 품질 개선에 큰 역할을 했다든지, 에이즈 바이러스가 증폭되는 것을 차단하는 단백질 구조 규명이 가능했던 것도 포스텍의 방사광가속기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