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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자유언론실천운동과 광고탄압

입력 | 2010-09-27 03:00:00

썰물처럼 빠진 광고란에 밀물처럼 밀려든 격려광고




1974년 동아일보의 백지 광고란을 가득 채운 독자들의 격려 광고. 정부의 광고탄압이 계속되자 전국 독자들은 자유언론을 수호해 달라는 내용의 후원 광고를 잇달아 보내왔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71년 4월 15일 5년차 이하의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한 동아일보 기자들은 중앙정보부 요원의 사내 상주 또는 출입을 거부하고 기자적 양심에 따라 진실을 자유롭게 보도할 것을 결의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한국 언론 최초의 언론자유수호 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16일 한국일보, 17일 조선일보 대한일보 중앙일보 기자들의 선언문 채택으로 이어지며 5월 초까지 전국 14개 언론사로 확산됐다. 그러나 그해 10월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 발동에 이어 1972년 10월 유신이 단행되면서 언론자유는 다시 위축됐다.

동아일보의 언론자유수호 선언이 나오기 전인 3월 26일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의 학생회장단 30여 명이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을 연 뒤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중앙정보부 요원이 편집국에 수시로 출입하며 “이것은 빼고 저것은 키우라”고 하는 현실을 인식한 대학생들이 언론의 자성을 촉구한 행동이었다. 시위를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벌인 것은 동아일보가 한국 언론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1973년 10월 초 서울대에서는 유신 이후 최초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보도하려 했던 동아일보는 10월 4일자와 5일자 기사가 중앙정보부의 개입으로 강제 누락되자 해당 지면을 백지로 발행해 언론탄압의 실상을 대내외에 폭로했다. 이런 사건들을 계기로 2차, 3차 언론수호성명이 채택됐으나 그 성과는 개별 사안의 보도를 관철하는 선을 넘어서지 못했다.

1970년대 중반 동아일보 광고사태가 벌어졌을 당시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답지했던 상황을 풍자한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

이런 상황에서 1974년 10월 24일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은 획기적 돌파구였다. 오전 9시 15분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 3층 편집국에 모인 편집국 출판국 방송국 기자 180여 명은 ‘자유언론에 역행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언론 실천선언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했다. 행동강령으로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외부 간섭 배제 △기관원의 출입 거부 △언론인의 불법연행 거부 및 불법연행 시 연행자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는다는 3항을 채택했다. 실천선언이 지면과 방송에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자유언론실천특별위원회라는 기구도 설치했다.

실천선언의 파급효과는 3년 전 언론자유 수호선언의 파장을 넘어섰다. 그날 오후 한국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 선언을 한 데 이어 25일엔 경향신문 중앙일보 신아일보 등 31개 전국 신문·방송·통신사 기자들로 확산됐다. 동아일보는 ‘왜 자유언론을 부르짖는가’ 제하의 25일자 사설을 통해 자유언론의 뜻을 밝혔다.

유신정권이 이를 묵과할 리 없었다. 국내외 언론이 주목하고 있는 동아일보에 직접적 탄압을 가할 수 없자 간접적 고사(枯死)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가 직접 동아일보 광고주들을 남산 중정으로 불러 동아일보와 관련 매체에 광고를 주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보안각서에 서명을 받아냈다.

그해 12월 20일 그렇게 시작된 광고해약 사태는 1년 중 광고가 가장 많이 들어오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무더기로 몰아닥쳤다. 동아일보 광고 수입의 절반 이상을 점하던 8개 광고주가 일시에 광고계약을 철회했다. 크리스마스였던 12월 25일엔 극장광고가 일제히 끊겼다. 급기야 12월 26일엔 일부 광고면을 공란으로 내보내는 ‘백지광고 사태’가 초래됐다. 광고탄압 한 달가량인 1975년 1월 23일까지 평상시 상품광고의 98%가 사라졌다. 동아방송의 광고도 1월 7일 무더기로 사라지기 시작해 역시 한 달 만인 2월 7일까지 건수로는 88.7%, 금액으로는 91.7%가 떨어져 나갔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격려광고가 물밀 듯 쏟아졌다. 1975년 1월 1일자 ‘자유언론수호 격려’란 제하의 광고란에 22건의 광고를 필두로 31일까지 한 달간 무려 2257건의 격려광고가 쏟아졌다. 이러한 격려광고는 5069건으로 최고를 기록한 2월을 포함해 격려광고가 끊긴 5월 중순까지 1만352건에 이르렀다.

‘동아! 너마저 무릎 꿇으면 진짜 이민 갈꺼야-이대 S생’을 비롯해 ‘이렇게 화날 땐 어떤 약이 좋은지 광고야 말해다오-약사’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탄환임을 알라-○○출판사 편집부’ 등의 명문구가 쏟아졌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경영상태는 악화일로였다. 1972년 3300여만 원의 흑자를 기록했던 동아일보는 1973년 1억1000만 원 적자로 돌아선 데 이어 1974년엔 적자규모가 1억7000만 원으로 불어났다. 광고 해약사태 이후엔 하루 평균 315만 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결국 경영난 돌파를 위해 그해 3월 1실 3부를 폐지하는 과정에서 기자 18명이 해임됐다. 이 조치는 49명 해임, 84명 무기정직으로 이어진 ‘동아투위사건’으로 이어지며 동아일보에 큰 내상을 안겼다.

유신정권은 이후에도 타협을 종용해왔다. 6월 중순 양두원 중앙정보부 차장이 이동욱 주필에게 면담을 요청해 유신체제를 계속 수호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사설을 게재하라고 요구했다. 동아일보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사설 게재 요구를 철회한다는 조건으로 7월 11일 김상만 사장과 양두원 차장이 만나 밤샘 담판을 벌인 끝에 ‘긴급조치 9호를 준수한다’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광고 게재는 7월 16일 재개됐다. 광고탄압이 시작된 지 8개월 만이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격려광고는 가장 먼저 읽는 정치적 칼럼” ▼
해외언론 ‘광고투쟁’ 성원 빗발… 朴대통령에 항의전문 보내기도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 규탄 서명운동을 펼친 미국 언론인들이 1975년 2월 보내온 1차 서명인 명부.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세계 언론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광고탄압이 동아일보에 이어지자 해외 언론들도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백지광고가 나간 다음 날인 1974년 12월 27일 일본 일간지인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신문은 광고탄압 사실을 상세히 보도했다. 1975년 1월 14일 아사히신문은 ‘동아일보와 언론의 자유’ 제목의 사설에서 “우리는 동아일보 문제를 금후에도 주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 언론, 보도의 자유에 치명적인 타격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아사히신문은 1월 20일자 6면 전면을 할애해 광고탄압 특집기사를 실었다.

1월 중순부터는 미국과 유럽의 언론이 잇달아 특집기사로 광고탄압 사건을 다뤘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1월 16일자 ‘한국의 신문, 압력에 용감히 맞서고 있다’ 제목의 기사에서 광고탄압 경위와 국내외의 관심을 상세히 보도했다. 영국의 가디언은 2월 19일자에서 “조그만 격려광고들은 원래의 의도를 넘어서 한국인들이 신문을 펼쳐들고 첫 번째로 읽는 정치적 개인칼럼”이라고 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뉴스위크, 프랑스의 르몽드 르피가로도 특집기사와 사설로 광고탄압의 실상을 다뤘다.

국제 언론단체들도 동아일보에 대한 격려와 한국 정부에 대한 항의에 나섰다. 국제신문편집인협회(IPI)의 어네스트 마이어 사무국장은 각국 회원들에게 동아일보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제기자연맹(IFJ)과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는 대표 명의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문을 보내 “현재의 동아일보 사태에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동아일보가 공정한 조건 아래서 발간될 수 있도록 귀하가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기 바란다”고 항의했다. 국제신문발행인협회는 매년 언론자유의 증진에 기여한 인사에게 주는 ‘언론자유 금펜상’의 1975년 수상자로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을 선정했다.

외국 저명 언론인이 동아일보에 보내는 격려 메시지도 이어졌다. 데니스 헤밀턴 더 타임스 회장 겸 주필은 “동아일보는 사원들과 국민, 그리고 각국 자유언론의 성원으로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세계의 민권 및 정치권력을 조사 평가해온 미국 단체 프리덤하우스는 ‘정부의 입김이 서린 새로운 고통을 주는 행위’라고 광고 해약을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 격려광고 낸 유재천 現상지대 총장
“신방과 교수 12명 규합 탄압규탄 광고 큰 파장”



“상식을 넘어서는 사상 초유의 광고탄압 사태를 언론학자들이 손놓고 바라만 볼 수 없었습니다.”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와 이에 따른 격려광고 물결이 이어지던 1975년 2월 10일,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서울시내 언론관련 학과 교수 12명의 이름으로 광고가 실렸다. 이 움직임을 주도한 유재천 상지대 총장(당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사진)은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논하는 학자들로서 해야 할 일을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유 총장은 “나와 강현두, 이강수 교수 3인이 시국에 관해 얘기를 나누다가 격려광고를 싣자는 데 합의하면서 일이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뜻을 같이할 만한 교수들의 명단을 함께 작성한 뒤 일일이 전화로 설득했죠. 12명에게서 5만 원씩 걷어 60만 원을 마련한 뒤 세 사람이 광화문 사거리의 다방에서 문안을 작성했죠. 문안과 광고비를 들고 동아일보사로 올라갔어요. 송건호 편집국장이 홍승면 주필에게 안내하더군요.”

홍 주필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교수들이 자신들 명의로 의견을 표현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우려를 표시했다. 송 편집국장도 같은 의견이었다. “성의는 충분히 알겠지만 교수들 신상에 닥칠 위협이 염려된다”며 말리는 두 사람 앞에 세 교수는 억지로 문안과 광고료를 떠밀 듯 맡기고 나왔다. 같은 날 석간에 광고와 기사가 실렸다. “우리가 걷은 광고비에 비해 큰 지면을 떼어주셨더군요.”

언론학자들이 나서 광고탄압을 규탄한 이 광고는 큰 파장을 불렀다. 참여 교수가 없는 대학의 학생들이 ‘부끄럽다’는 광고를 내기도 했고 참여 학교의 학생들이 ‘교수님들의 뜻에 동참한다’는 광고를 싣기도 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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