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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회한은 반복된다, 되감은 테이프처럼…

입력 | 2010-09-28 03:00:00

1인 이미지극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무대★★★★☆ 연출★★★★ 연기★★★☆ 대본★★★★




입체적 조명으로 강렬한 흑백효과를 살린 로버트 윌슨의 1인극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사진 제공 레슬리 레슬리-스핑크스

24, 25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는 소극장 무대에 어울리는 1인극이다. 그럼에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1200석 무대에 올랐다. 2010 서울연극올림픽의 개막작으로 공연된 이 작품은 참가작 48편 중 유일하게 1000석 이상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공연시간은 60분. 일반 연극의 절반밖에 안 되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최고 7만 원의 티켓 가격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관객이 모였다. 3회 공연 내내 1200석 중 900석 이상이 찼다. 미국 출신의 세계적 연출가 로버트 윌슨(69)의 이름값을 과시한 무대였다.

‘고도를 기다리며’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1958년 발표한 이 작품의 주인공 크라프는 매년 자신의 생일에 지난 1년의 기억을 반추하는 내용을 육성 테이프로 녹음하는 별난 취미를 가진 사내다. 극은 69세 생일을 맞은 크라프가 과거의 테이프에 녹음된 내용을 들으며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는 내용. 대개 노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력으로 승부를 거는 작품이다.

극중 크라프와 같은 나이를 맞은 윌슨은 이를 조명과 분장, 사운드를 활용한 강렬한 흑백의 이미지극으로 끌고 갔다. 관객을 처음 압도한 것은 소리였다. 찢어질 듯한 천둥소리에 이어 함석지붕을 거세게 때리는 빗줄기 소리에 객석은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다음은 빛이었다. 강한 빗줄기의 소음 속에서 짙은 어둠 속에 앉아있던 크라프 역의 윌슨의 얼굴에 조명이 비치는 순간 하얗게 분칠한 얼굴이 드러났다. 극중 크라프의 삶에 광대로서의 삶을 투영하는 시각효과였다. 이와 함께 검정 녹음테이프가 길게 꽂혀 있는 등 뒤의 책장과도 극적인 대조를 이뤄냈다.

세 번째는 시간이었다. 빗소리와 흑백의 강렬한 조명 속에서 동상처럼 굳어있던 그는 달팽이처럼 움직였다. 천천히 껍질을 까서 바나나 먹기를 세 번 반복하는 데 17분의 시간이 흘러갔다. 강렬한 조명 아래 그토록 느린 슬로모션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카리스마가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윌슨은 그렇게 소리와 빛, 시간을 세 축으로 삼아 자신만의 시공간을 구축했다. 베케트의 이야기로 그 속을 채워 넣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대극장 무대라서 마이크를 사용하긴 했지만 노배우의 발성은 너무도 또렷하고 정확했다.

핵심은 반복이었다. 녹음된 테이프를 틀다 멈추고 되감아 다시 들려주길 반복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신념이나 비전의 순간이 아니라 정념의 순간임을 일깨운다.

이지미극의 대가가 지닌 한계가 그 순간 노출됐다. 인생에 대한 짙은 회한이 엄습하는 순간 윌슨의 크라프는 뜨겁게 오열하기보다는 차갑게 식어갔다. 너무도 정교한 형식미에 갇힌 탓에 어눌한 감정의 부스러기 따윈 허용하지 않겠다는 그런 차가움이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서울연극올림픽=11월 7일까지. 13개국 48편 공연. 02-747-2901∼3, www.theatreolympic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