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 먼저 맛보는 것을 말하자면 와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커피든 와인이든 재료 원산지, 품종, 다루는 방법 등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르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다양성의 범위를 놓고 보자면 둘의 차이는 확연하다. 와인은 포도로 만들지만 포도보다는 다른 여러 과일향을 비롯해 상상하기조차 힘든 생활 속 곳곳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와인의 이런 측면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와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도 많다.
반면 와인을 코로 맛보는 것에 익숙지 않은 이들은 향에 관한 언급이 구체적일수록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다. 일부는 “라즈베리, 블랙베리, 크랜베리와 같은 과일을 대체 언제 어디서 맛봤다는 거냐. 정말 이들을 구분할 줄 아느냐”고 말한다. 이 물음에 대답부터 하자면 “구분할 수 있다”이고, 결코 허풍이 아니라는 걸 뒷받침할 증거도 있다.
소믈리에가 되려는 이들이 주로 찾는 향 54종을 모은 키트도 있고, 오크통 숙성을 거친 와인향에 특별히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한 키트도 따로 있다. 향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와인을 즐기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일반적인 애호가라면 짧은 시간에 수많은 향을 인위적으로 기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기존의 익숙한 향에만 의존해 와인을 즐기는 것도 분명 한계가 있다. 이럴 때는 레드, 화이트별로 12가지 대표적인 향을 모은 키트가 있으니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아로마 키트 중에는 와인의 결함을 알려주는 냄새만을 모아놓은 것도 있다. 구성 목록을 살펴보니 양파, 콜리플라워, 썩은 계란, 짓무른 사과, 식초, 아교, 말 등 조금만 관심과 수고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주변에서 맡아볼 수 있는 향이라 굳이 키트의 도움이 없어도 될 것 같다.
와인에 언급되는 향이 너무 많다 보니 필자 역시 자연스레 여러 사물의 냄새에 호기심을 가지게 됐다. 지금까지 눈길조차 두지 않았던 것들에도 관심이 간다. 제 발로 식물원을 찾아가 내내 코를 벌름거리다 돌아온 적도 있다. 와인이 열어준 또 다른 세상이다.
김혜주 와인칼럼니스트
도멘 트라페 페르 에 피스, 샹베르탱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