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뵙고 싶었어요” “잘 살아줘 고맙소”
“죽기 전에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중위님.”(한정수 옹·79)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잘 살았다니 내가 더 고맙소.”(제럴드 윙거·85)
두 노인은 꼭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59년 만의 상봉. 19세와 25세 청년의 맑던 얼굴엔 이미 깊은 주름이 내려앉았건만 둘은 “옛 모습 그대로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1951년 수원 미군비행장의 한정수 씨(가운데)와 제럴드 윙거 중위(앉은 이). 젊은 얼굴이 앳돼 보인다. 당시 비행중대 부관으로 있던 윙거 중위는 개인적 친분도 없었지만 한 씨의 딱한 사정을 듣고 선뜻 거금을 내놓았다.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소.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중위님이 등록금 15만 원을 대신 내줬다는 겁니다. 그 정도면 쌀 30가마를 살 수 있는 큰돈이거든요. 한번은 ‘왜 이렇게 도와주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말없이 미소만 짓던 모습이 떠오릅니다.”(한 옹)
하지만 1953년 윙거 중위가 전근을 가며 이들은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당시 윙거 중위는 후임자에게 부탁해 한 옹의 나머지 학비도 모두 챙겨놓고 떠났다. 그 덕분에 무사히 졸업한 그는 농림부 사무관, 농협대학 교수 등을 지내며 살아왔다. 그러나 오래도록 은혜를 잊지 못하던 한 옹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보내며 수소문했으나 은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올해 4월 한 언론에 소개된 사연을 본 퇴역 한국인 대령이 도와 극적으로 행방을 알게 됐다.

지난달 26일 미 새크라멘토에 있는 윙거 중위의 자택에서 만난 한 씨(왼쪽)와 윙거 중위. 반갑게 포옹하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사진 출처 새크라멘토비 홈페이지
“중위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어도 눈감을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야 생애 가장 큰 소원을 풀었어요. 베푸는 삶을 가르쳐 주신 분. 오래오래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한 옹)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