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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한글이 없다면

입력 | 2010-10-09 03:00:00


우주와 인간-김정택 그림 제공 포털아트

한글이 없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합니다. 우리말은 있으나 우리글이 없는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옮길 수 있는 글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한글 창제 이전처럼 한자를 사용할 겁니다. 한글 창제 이전의 양반들은 정치적 경제적 지배 발판을 한문으로 삼았습니다. 요컨대 양반만이 한문을 공부하고 과거 제도를 통해 관료 체제에 편입해 온갖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양반 세상에서 세종이 한글 창제를 꿈꾸었다는 건 혁명적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종이 신하를 시켜서 한글을 창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는 세종 자신이 한글 창제를 주도한 언어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세종실록’에서도 훈민정음에 대해서만은 유일하게 ‘친제(親制)’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비밀리에 진행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진행했다면 양반 기득권 세력의 반대로 훈민정음 창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글은 ‘한(韓) 나라의 글’이고 ‘큰 글’이고 ‘세상에서 첫째가는 글’입니다. 한글이 있어 지금 우리는 우리의 말과 생각을 글로써 표현합니다. 한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컴퓨터 자판과 휴대전화 자판은 모두 한문을 구현하기 위한 조합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민족의 바탕은 고유의 말과 글이고 그것이 없으면 민족이라고 내세우기가 어렵게 됩니다. 만주어와 만주족이 사라진 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만들고 지켜온 한글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똑똑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한글은 사용자로부터 학대당하고 혹사당하고 멸시당합니다. 채팅과 휴대전화 문자에서 으깨지고 뭉개지고 비틀어집니다. 서울은 ‘Hi Seoul’이고, 수원은 ‘Happy Suwon’이고, 한국은 ‘Dynamic Korea’이니 한글의 문전박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셈입니다. 도대체 국가적 정체성의 기반을 모조리 영어에 헌납한 뒤에 국제화되고 세계화되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외국어로 일색을 이룬 아파트 상가 간판의 홍수에 떠밀려 한글은 지금 이 골목 저 골목 어두운 사각지대를 배회합니다. 제 집에서 문전 박대당하고, 제 집에서 쫓겨난 한글의 신음이 국적 불명의 도시를 배회합니다. 하지만 제 집으로 돌아가 한글의 이름으로 눌러앉을 만한 빈틈은 여전히 없어 보입니다.

한글이 없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시간입니다. 한글이 창제되지 않아 여전히 한자를 사용하는 한국인, 일제강점기처럼 일본말과 일본이름을 사용하는 한국인을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내가 물려받은 한글, 내가 배운 한글, 내가 쓰는 한글이 얼마나 아름답고 완벽한 정신적 유산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한글, 우리 마음에 품고 우리 마음처럼 평생 갈고닦아야 할 보배입니다.

박상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