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내 심장을 쏴라’ 연출★★★☆ 무대★★★☆ 연기★★★ 대본★★★
“날 쓰러뜨리고 싶다면 내 심장을 쏴라.” 미치거나 혹은 갇혀버린 청춘을 되찾으려는 젊은이들의 눈물겨운 고군분투를 그린 연극 ‘내 심장을 쏴라’. 사진 제공 남산예술센터
실상은 거꾸로다. 수명은 헌책방 주인인 아비가 정신병자였던 어미를 가위로 찔러 죽였다는 환상에 시달린 지 오래다. 그로 인해 가위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공황장애로 이발을 못해 허리까지 머리카락을 길렀다. 게다가 헛것과 대화를 나누는 ‘스키조’(정신분열증)로 7년간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한 이력을 지녔다. 승민은 열네 살 때 홧김에 별장을 불태운 ‘라이터’(방화범)였지만 미국으로 쫓겨났다가 패러글라이딩 선수가 됐다. 하지만 아비의 부음 소식에 몰래 귀국했다가 유산분쟁에 휘말려 정신병원에 유폐됐다. 그게 억울해 툭하면 탈출을 시도하다 미쳐간다. 수명이 ‘미쳐서 갇힌 놈’이라면 승민은 ‘갇혀서 미친 놈’이다.
연극과 그 원작이 된 정유정 원작소설(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 설정한 구도는 이렇다. 하지만 이를 라캉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달라진다. 라캉은 어떤 사회의 토대가 되는 규율과 금기가 내면화한 상징질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정신질환을 셋으로 분류했다.
도착증은 그 중간에 위치한다. 즉, 상징질서 자체는 인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수반되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외면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이는 상징질서를 대표하는 아버지와 관계설정에 실패하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명과 승민 역시 그렇다.
둘은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난 철저한 아웃사이더지만 성격은 반대다. 승민이 정신병원의 상징질서를 정면으로 위반한다면 수명은 그것을 열심히 따르는 척하면서 그 모순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이를 도착증을 대표하는 가학증(사디즘)과 피학증(마조히즘)의 대조적 특징으로 설명했다. 만사에 거침없고 능동적인 승민이 가학적 도착증 환자라면 내성적이고 수동적인 수명은 피학적 도착증 환자다.
전극의 양극, 음극과 같은 둘의 만남은 한동안 스파크만 일으키다 마지막 순간 하나의 자장을 형성하면서 큰 감동을 선사한다. 달팽이집 같은 자기만의 성에 갇혀 세상과 맞서 싸우지 못하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감동이다. 그것은 양극과 음극이 뒤바뀌면서 이뤄진다. 그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은 정신병과 신경증에 시달리는 정신병원 환자들이다. 다양한 캐릭터를 지닌 환자들이 승민과 수명이 펼치는 트위스트 춤판에 하나가 되는 순간은 그런 극적 전환의 순간을 상징한다.
연극적 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원작에 매몰된 고연옥 씨의 대본은 실망스럽다. 스키조와 바이폴러(조울증) 등 전문용어를 풀어주지 않은 점도 아쉬웠다. 그 대신 자동차와 보트 경주, 패러글라이딩 타기 등 영화적 요소가 강한 원작의 무대를 최소화한 세트와 조명, 연필 크로키 흑백영상을 활용해 담백한 무대 연출로 풀어낸 김광보 씨의 연출력이 돋보였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만5000원. 27일까지 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예술센터. 02-758-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