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기용된 일부 해외 유학파 엘리트들이 국민 정서와 거리가 있는 정책과 발언을 내놓아 빈축을 산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항쟁,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등 한반도 변혁의 시기를 해외에서 보냈던 이들은 역사가 각인한 집단적인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기억의 공백’을 감수해야 한다.
지난달 열린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북한의 3대 세습 후계자로 얼굴을 내민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도 어린 시절 해외 유학의 경험이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소지가 다분하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에 따르면 김정은은 1996년 여름부터 2001년 1월까지 스위스 베른에 체류하면서 고교 저학년까지를 이수했다.
굶어 죽어가는 주민들을 뒤로하고 관광의 나라에서 6년을 지내고 온 후계자는 당장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먼저 통치 능력의 문제다. 그는 주민 대부분이 가족과 친구가 굶어 죽어 가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본 집단적 충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주민들이 왜 공장과 기업소에 가지 않고 자본주의적 ‘황색 바람’이 부는 시장에서 생계를 유지하는지 이해 못할 수도 있다. 통치당하는 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까.
다음은 후계자로서의 정당성 문제다. 북한 주민들은 국가적 위기의 시기에 혼자 외유를 즐긴 그를 진정한 지도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유학 시절 7개 외국어를 배우는 등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쌓았다고 아무리 선전해도 온 국민이 함께 사선을 넘은 ‘고난의 행군’ 대열에서 혼자 이탈한 전력이 세탁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백승주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은 “김정은이 어려서 개방된 서구사회를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기반이 든든해지면 북한을 좀 더 열린사회로 이끌고 갈 수 있다”고 기대했다.
김정은이 능력과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보다 좋은 지도자가 되려면 주민들에게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무엇보다 주민들을 잘 먹여야 하고 그러려면 대외관계를 개선해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 스위스 학교에서 해외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잘 지냈던 경험을 최대한 살리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신석호 정치부 차장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