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판사들은 형사 재판에서 중세 이후의 전통인 흰색 가발을 쓴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개인이 아닌 재판관’의 존재와 법정의 존엄성을 부각시킨다는 뜻에서다. 우리 판사들이 검정 넥타이와 법복을 착용하고 법정에 들어가는 것도 같은 차원이다. 새파란 젊은 판사보다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판사가 재판을 진행하는 모습이 훨씬 믿음직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외관을 권위 있게 보이게 하려는 노력도 일정 부분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법복과 법정 법원의 권위는 판사가 아니라 재판을 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고 김홍섭 판사의 전설 같은 몸가짐은 후배 판사들에게 살아있는 교훈이다. 김 판사는 1961년 사형선고를 받는 피고인들에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나와 피고인 어느 쪽이 죄인인지 알 수 없다.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해 여러분을 단죄하는 것이니 이해 바란다”고 해 심금을 울렸다. 김 판사는 며칠 뒤 쌀 한 말씩을 들고 생계가 어려운 피고인 가족들을 찾아 다녔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걸 늘 두려워하면서 겸허한 자세를 잃지 않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권위가 전설처럼 따라다닌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