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는 진화하는가/황경식 지음/철학과 현실사
30년 넘게 정의와 윤리 연구에 매진한 서울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정의(正義)’에 대해 뚜렷한 ‘정의(定義)’를 내리기가 어려운 까닭을 이렇게 짚었다. 그는 정의에 대한 기준의 애매성과 그에 따른 문제점을 꼬집는다.
“부정의의 극복을 어렵게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정의의 이론이 갖는 추상성 내지 다의성에 기인한다. 정의의 기준이 갖는 이러한 애매성은 결국 ‘각자에게는 그의 정의가 있다’는 난맥상을 초래하게 되며 이러한 혼돈은 어떤 부정의도 정당화될 소지와 구실을 마련하게 된다.”
정의는 복잡다단한 복합체여서 그 기준을 마련하기 쉽지 않고, 결국 정의의 잣대가 없다보니 부정의가 판친다는 것이다. 독일 출신의 철학자 아르투어 카우프만은 분배적 정의의 기준을 제시할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 기존 분배적 정의의 공식이 대체로 순환론적이거나 공허한 것이며, 이도 아니면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추상적이어서 그들 간에 충돌이 불가피하며 결국 분배적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는다.
하지만 저자는 레셔의 관점에도 흠이 있다고 지적한다. “다원적인 요구 간의 상충을 상호 조정하려는 시도는 그 요구 간의 비중을 대비, 환산하는 데는 결국 모종의 직관에 의한 의존이 불가피하다. 다양한 요구 간의 양적 통산을 가능하게 하는 계산이 제시되지 못한 채 지극히 자의적, 주관적 직관의 조정에 의존할 경우 회의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정의를 “이익을 보려거든 정의를 생각하라”는 격언에 비춰 풀이했다. 이익을 보거든 그것이 정의에 부합하는 이익인지 아닌지를 분간해서 정의로운 이익이면 취하고 아니면 버려야 한다는 것.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정의로운 이익, 즉 정익(正益)이며 이런 점에서 분배적 정의 또한 사익(私益) 가운데 정의로운 이익과 부정의한 이익을 분간해 정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저자는 정치가가 걸어야 할 ‘정의의 길’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정치가는 공인으로서 보통 시민 이상으로 사욕을 억제하고 공익을 도모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정치가의 패륜과 도덕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
그는 이른바 ‘윤리 따로 정치 따로’의 이원적인 사고에 대해서도 “용납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설사 공직자가 공익을 도모하기 위해 때때로 일견 비도덕적인 행위가 불가피한 상황이 될지라도 그러한 비행이 불가피한 것임을 입증해야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비행이 초래할 악이 공익이라는 더 큰 선에 의해 결과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