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과거제도를 통해 송나라 지식인들은 가문과 신분을 뛰어넘어 누구나 공직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학문과 지식을 숭상하는 풍토가 자리 잡았다. 같은 시기에 유럽은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누구도 자신이 속한 계급의 벽을 넘을 수 없었으며 신분 상승의 유일한 통로는 전쟁에 나가 뛰어난 공을 세우는 길밖에 없었다. 이런 시대에 송나라의 인재채용 방식이 갖는 문화적 의미는 작지 않다.
중국 당나라 시대(7∼10세기) 수도 장안(현재의 시안·西安)은 세계를 향해 문호가 개방된 국제도시였다. 서쪽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이방인들이 몰려들었고 한국 일본에서도 장안을 찾았다. 당나라는 포용성이 뛰어났다. 불교는 물론이고 이슬람교 기독교 배화교 등 세계의 여러 종교가 이곳에 전파돼 꽃을 피웠다. 장안의 인구는 100만 명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외국인 거주자는 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나라 시대의 장안이 ‘세계의 수도’로 불린 배경이 그러했다.
중국 문명을 평가하는 데 인색한 서양 학자들조차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중국의 문화 및 경제 공업 수준은 유럽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고 인정한다. 중국은 19세기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서구 열강에 무릎을 꿇었지만 그 이전까지 중국의 문명과 문화는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우리에게도 중국은 넘보기 힘든 문화대국이었다. 청나라 시대(17∼20세기 초) 수도 베이징은 세계의 학문과 지식이 모이는 곳이었다. 중국 고전부터 서양의 과학기술까지 모든 학문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유리창(琉璃廠) 거리는 무려 27만 칸에 이르는 수많은 책방으로 가득한 ‘문화의 거리’로 조선 지식인들을 가슴 설레게 했다.
조선의 문예(文藝)군주 정조는 베이징에 사신으로 가는 신하들에게 이곳에서 최신 서적을 구해 오라고 주문했다. 조선의 실학자들은 베이징을 오가며 천문 지리 수학 등 새로운 지식을 수집했다. 한국에 천주교를 뿌리내리게 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등 서학도 베이징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중국은 주변 이민족들의 침략에 끊임없이 시달렸으나 문화가 이를 이기는 큰 힘이 됐다. 주로 유목민들인 변방 세력들은 군사적 힘에서는 앞서 있었으나 중국은 이들을 ‘중국 문화의 교화를 받지 못한 오랑캐’라며 무시했다. 중국의 선진적 제도와 앞선 문물에 감탄한 주변국들은 타협을 모색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선에서 외교관계를 맺었다. 정기적으로 조공을 주고받는 이른바 ‘중국적 세계 질서’ 안으로 편입됐던 것이다.
‘문화 결핍’ 초강국에 세계가 우려
중국의 경제력 군사력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세계역사에서 중국처럼 많은 인구를 보유한 단일국가는 없었다. 중국은 인류가 과거 경험한 적이 없는 초강대국으로 조만간 부상할 것이다. 지금도 세계는 중국의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요동친다. 이런 막강한 나라가 문화적으로 결핍된 국가라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우리는 더 답답하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