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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에 관하여’ 20선]덕의 상실

입력 | 2010-10-22 03:00:00

◇덕의 상실/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지음·문예출판사




《“내 자신의 결혼은 매우 분명하다.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3세기에 걸친 도덕철학과 1세기의 사회학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관점에 대한, 합리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어떤 정합적 서술도 결여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은 우리의 도덕적, 사회적 태도들과 책무들에 대한 이해 가능성과 합리성을 복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서술될 수 있다.”》

좋은 것과 옳은 것 사이

정의는 무엇에 토대해야 하는가. 좋은 삶인가 옳은 삶인가. 고대부터 16세기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좋은 삶’을 그 토대로 삼았다. ‘좋은 삶’은 무엇인가. 공자가 말한 부부자자군군신신(父父子子君君臣臣)의 삶이다.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답고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삶이다.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텔로스(목적)에 부합하는 삶이다.

하지만 근대적 개인주의의 관점에선 이런 목적론적 삶이 부당하다. 내 자유로운 존재지평을 나의 자유의지와 무관한 사회질서에 끼워 맞추도록 강요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보편적 이성에 근거하는 ‘옳은 삶’이다. 17세기 이후 칸트와 롤스로 대변되는 윤리학자들의 철학적 탐구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문제는 그 결과, 우리는 저마다 옳다고 주장하는 의견과 신념의 아귀다툼을 목도할 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를 수 없는 시대, 좋게 말하면 ‘도덕적 다원주의의 시대’이고 나쁘게 말하면 ‘도덕적 무능의 시대’다. 마이클 샌델, 찰스 테일러, 마이클 왈저와 함께 공동체주의 4대 이론가로 꼽히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교수가 1982년 발표한 이 책의 문제의식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우리의 도덕철학이 비교적 최신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옳은 삶’을 토대로 덕(virtue)을 규정하고 구현하려고 했던 근대 윤리학의 실패를 다룬다. 후반부는 고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그리고 중세 교부철학과 빅토리아시대 윤리에 녹아 있는 ‘좋은 삶’에 토대한 덕의 역사적 변천을 추적한다.

그 가운데에 등장하는 9장의 제목 ‘니체인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인가’는 의미심장하다. 니체는 근대 계몽주의적 기획이 추구한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도덕주체가 허구이고 환상임을 명쾌하게 간파했다. ‘도덕의 모든 합리적 정당화는 실패한다’는 그의 진단은 옳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적 초월성이 도덕적 권위의 원천이 돼야 한다’는 그 처방은 틀렸다. 전통적 도덕에서 해방된 개인을 ‘위대한 인간’으로 그리는 니체의 초인사상이야말로 개인주의의 또 다른 극치이기 때문이다.

그를 대신한 매킨타이어의 처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학으로의 회귀다. 그것은 우리의 도덕관념과 정의관은 보편적 이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수성에서 발현한다는 것을 먼저 수긍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의가 영구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역사적 지역적 산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옳은 삶’에 대한 합리적 토론은 이렇게 합의된 ‘좋은 삶’ 이후에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 책이 주된 화두를 ‘칸트냐 아리스토텔레스냐’가 아니라 ‘니체냐 아리스토텔레스냐’로 설정한 이유도 여기에 숨어 있다. 보편주의를 대표하는 칸트와 대립시킬 때 쏟아질 상대주의라는 비판이 비합리적인 니체와의 대립을 통해 약화되면서 ‘제한적 합리주의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덕 이후’라고 번역될 수도 있고 ‘덕을 찾아서’라고 번역될 수도 있는 이 책의 원제 ‘After Virtue’에 깔려 있는 또 다른 무의식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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