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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이종훈]파리에서 본 서울

입력 | 2010-10-25 03:00:00


나는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다.

1990년대 중반 기자가 잠시 머물렀던 시절 ‘파리 속의 한국’에 대한 기억을 두서없이 모아봤다. 한국 슈퍼마켓은 1곳, 한국 식당은 5, 6곳. 서민 식품인 소주와 라면의 가격은 한국의 6, 7배나 됐다. 왜 이렇게 비쌌을까. 경쟁력이 없었다. 소비자는 한국인뿐이었다.

파리10대학 도서관에는 북한 관련 서적이 남한 관련 서적보다 더 많았다. 프랑스 최대 전자제품 유통매장인 다르티에서 삼성과 대우 TV는 14인치가 진열대 맨 끝 구석에 초라하게 있었다. 한국 자동차는 볼 수 없었다.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에 가면 한국을 모르는 직원이 태반이었다. 서울 인구가 1000만 명이나 되고 강남구에는 한 채에 수십억 원 하는 빌라가 많다고 말하면 “진짜냐”고 묻는 친구가 많았다. 이들은 한국이 터키나 그리스보다 훨씬 못 사는 후진국인줄 알고 있었다. 한국이 아시아의 작은 후진국처럼 더 유명해진 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였다. 퐁뇌프 다리나 라파예트 백화점이 그냥 무너지는 걸 상상할 수 없었던 이들로선 그럴 만도 했다.

2010년 10월 파리 속의 한국은? 슈퍼마켓은 10곳, 식당은 최소 100곳이 넘는다. 식당 손님의 70%는 프랑스인 등 외국인이다. 상당수의 중국계 식당은 적당히 흉내를 낸 한국 불고기요리로 떼돈을 번다. 삼성과 LG TV 등 전자제품은 다르티와 카르푸 등 대형 유통매장에서 귀빈 대접을 받는다. 이동통신 대리점에 가면 절반은 한국 휴대전화다. 소형부터 스포츠유틸리티까지 한국 자동차도 자주 눈에 띈다. 축구가 국기인 이곳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당시 한국 차의 TV 광고가 정말 ‘지겹게’ 나왔다. 지하철역 곳곳에 설치된 삼성 최첨단 TV를 발견해도 별 감흥이 없다.

프랑스 한국학계 원로인 이진명 리옹3대학 교수는 “90년대에는 가을 개학시즌이 되면 수강생이 10여 명에 불과해 폐강을 우려했다”며 “리옹3대학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수강하는 학생은 올해 94명이고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택한 학생도 작년 70명에서 90명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한국학과 교수가 3명인 파리7대학은 내년 봄 한국학 교수를 한 명 더 뽑는다.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의 한국어 강좌 수강생은 2007년 70명에서 올해 300명으로 급증했다. 200명은 줄만 섰다가 그냥 돌아갔다. 최준호 문화원장은 “급증하는 한국어 수요에 잘 대처하지 못하면 실기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1년 남짓 파리에서 바라본 서울은? 대한민국 군인 46명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소중한 목숨을 잃었는데 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면서 정부가 거짓말로 국민을 속인다고 외치는 사람이 도처에 넘친다. 인터넷에서는 공인도 아닌 한 연예인의 학력이 가짜라고 믿는 수십만 명이 컴퓨터게임처럼 마녀사냥을 즐긴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정의라는 미명하에 타인에게 큰 피해를 주는 ‘왜곡된 정의관’이 판친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조차 ‘악의 승계’라고 지적한 북한 김정일 김정은 부자의 3대 세습에 대해 한 진보정당의 대표는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의 법정 논리이며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세습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게 옳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유럽의 중심에서 10여 년 만에 극적으로 변한 한국의 위상을 서울에서는 정말 몰랐다. 그런 한국에서 소설처럼 벌어지는 수많은 일이 얼마나 한심하고 황당한 것인지도 서울에서는 잘 몰랐다. 그래서 지금 한국인으로서 동시에 느끼는 자부심과 부끄러움이 어색하고 혼란스럽다.

이종훈 파리 특파원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