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H 군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이전 학교에서 H 군을 괴롭히던 무리가 이 소문을 우연히 듣게 된 것. 대여섯 명이 H 군의 개인 홈페이지 방명록에 ‘네가 무슨 일짱이냐, 미친 ×’ ‘깝치면(‘까불면’이란 뜻의 은어) 죽는다’는 글을 15페이지 이상 써놓았다. 이 글을 본 새 학교 학생들은 H 군을 따돌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다시 왕따가 됐다.
학생들 간 ‘사이버 왕따’가 심각하다. 사이버 왕따는 개인 홈페이지나 게임 사이트 등 온라인상에서 한 학생을 희생양 삼아 누리꾼들이 집단으로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현상을 일컫는다.
사이버 공간에서 말과 소문의 전파속도는 현실세계보다 빠르다. 전파 범위도 훨씬 더 넓다. 현실세계에서 겪는 왕따는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인물들에게서만 괴롭힘을 당하지만, 사이버 왕따는 생전 알지도 못하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될 수 있다.
사이버 왕따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국한해 일어나지 않는다. 학생들이 평소 사담(私談)을 짧은 글로 주고받는 온라인 메신저도 최근엔 사이버 왕따의 ‘온상’이 됐다.
부산의 한 중학교에 다니는 K 양(15)이 예. K 양은 얼마 전 같은 학교 친구 L 양 때문에 사이버 왕따를 당했다. K 양과 말다툼을 한 L 양이 앙심을 품고 “내 남자친구를 K가 뺏어갔다. 걔가 원조교제를 뛸 때부터 유명했다. 조심해라”라는 내용의 악성 루머를 자신과 친한 친구 6명에게 메신저 쪽지로 보낸 것이다. 쪽지를 받은 학생들은 컴퓨터 키보드의 ‘복사하기’ ‘붙여넣기’ 기능을 통해 이 내용을 또 다른 친구들에게 알렸다.
K 양은 주변 친구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가 지나갈 때마다 교내 곳곳에서는 따가운 시선과 함께 수군거림이 계속됐다. K 양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이 소문이 끝까지 나를 따라다닐 것 같아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소연했다.
“게임에 접속한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채팅 창이 있어요. 거기다 친구들이 제 아이디를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닉네임) ×나 못 해서 병× 같다’라고 쓴 거예요. 그 이후로는 다른 그룹에 속해 게임을 하려 해도 금방 소문이 퍼져 저를 안 받아주고요. 학교에서 저를 싫어하는 친구들은 채팅 창으로 욕을 해요. 그러면 함께 게임을 하던, 제가 모르는 누리꾼들도 덩달아 저를 욕해요. 정말 괴로워요.”
사이버 왕따는 최근 유행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더욱 ‘진화’하고 있다. 학생들이 ‘트위터’나 ‘미투데이’ 같은 단문 블로그 형식의 SNS를 이용하면서 따돌림 현상은 거의 ‘빛의 속도’로 확산될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 단문 블로그는 한 사람이 누군가를 왕따 시키는 글을 작성해 올리면 그 사람을 ‘팔로잉’(기존 메신저 서비스의 친구 추가와 같은 기능)하는 사람 모두에게 실시간으로 퍼져나간다. 서울의 한 중학교 상담교사는 “온라인 ‘아바타’로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는 현상에서 알 수 있듯 사이버 세계는 감수성이 예민한 중고교생에게는 현실세계 이상으로 소중한 공간”이라면서 “이런 사이버 세계에서까지 따돌림을 받아 마지막 ‘도피처’를 잃을 경우 심각한 우울증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재원 기자 jj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