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 동의서 도장 찍는 사람들
북한의 3대 세습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완전 폐기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다. 이 세습은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어느 것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남쪽의 진보라는 사람들에게선 ‘조선은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다’는 노래도, 고함도 없다.
남쪽의 소위 진보는 북한 왕조권력이 김일성 일가와 권신집단의 특권 교환을 통해 세습되는데 대해 두둔하거나 어물어물할 뿐이다. 그러면서 국내의 외교관 특채 같은 것은 ‘불평등 죄악’으로 단죄하는데 기민하고 모질다. 평등은 진보주의가 앞세우는 가치지만 우리 주변의 진보는 남과 북에 전혀 다른 잣대를 댄다. 그 이중성조차 진보의 내재적 가치인지 모르겠다.
인류의 가장 보편적 가치는 인권이다. 문명사는 한마디로 인권 신장의 역사다. 시민의 권리와 자유, 정치권력의 제한, 선거 및 언론의 자유, 잔인한 형벌의 금지 등을 담은 17세기 영국 권리장전은 곧 인권선언이었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평등·박애의 이상(理想), 미국 독립선언서에 담긴 생명·자유·행복 추구권, 대한민국 건국이념이자 헌법정신인 자유와 민주주의도 인권에 수렴된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세습왕조는 이런 인권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구현하지 않았다. 정반대로 이천수백만 주민을 인권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체제의 인질로 잡고 인권 말살을 자행해왔다. 3대 세습은 인권 유린의 고착화 과정이다. 김정일 일가의 정치권력은 확대 세습되고, 선거 대신 위압적 군중대회와 열병식으로 자유를 질식시키며, 지옥 같은 강제수용소를 통해 반대를 잠재운다. 말이 조선노동당이지 기실은 노예 수준의 노동 착취로 극소수 특권층만 향락을 누리며, 대다수 주민은 굶주림으로 내몰아 생명을 위협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탈북자들의 도망은 또다른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김일성 왕조의 이익공동체를 구축한 군·당·정의 기득층만이 자원 배분권을 행사하며 체제 유지에 혈안이 돼있다.
김일성 왕조와의 통일도 좋다?
이 땅의 좌파는 학생인권조례라면서, 배우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규율마저 내던지고 무한자유, 그것도 홍위병 식 정치자유까지 줘야 한다고 설친다. 기름을 끼얹어 경찰을 숨지게 한 사람들을 민주인사로 둔갑시켜 인권 승리를 자축한다. 이들이 북한 주민의 인권을 철저하게 유린한 김정일 집단에게 얼굴 한번 붉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결국 이들이 하나 되고자 하는 ‘민족’은 ‘김일성 조선’으로 국체를 확정한 김정일 김정은 세습왕조집단일 뿐인가.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어제 국회 연설에서 “분단국가 대통령의 가장 큰 소명은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라며 이 대통령을 압박했다. 박 원내대표는 어떤 통일을 그리고 있는가. 그는 최근 3대 권력세습에 대해 “북한에서는 그게 상식이다. 그것(후계)은 자기들 상식대로 하는 것이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家)에서도 아들로 태어나면 왕자가 되는 거 아니냐”고 기자들 앞에서 말했다.
21세기 지구촌 문명을 거부하는 저 야만(野蠻)이 정말 상식인가. 전제(專制)세습이 상식인 왕조체제, 그것도 다수 주민을 동물처럼 짓밟는 체제와 어떤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5000만 대한민국 국민이 그런 체제에 승복하고 하나가 되라는 것인가. ‘어떤 인권 억압에도 반대한다’는 대한민국 제1야당 민주당의 정강정책은 헛말인가.
박 원내대표가 영국과 북한을 동렬에 세운 것부터가 상식부족이거나 세상을 얕보는 언사다. 영국 왕자가 통치를 하는가. 영국 역대 총리들이 김정은 식으로 등장했던가. 아무리 북한 세습을 비호하고 싶어도 영국 민주주의와 영국 국민을 그렇게 모독할 수는 없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