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들… 인공물 없는 자연…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 온 느낌
해변에서 석양을 보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절대적인 시간이 길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 느끼는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흔한 테이크아웃 커피점이나 노점상도 없이 자연과 독대하는 이곳에서는 시간이 서울과 달리 흘렀다.
“외국인=$$$입니다. 현금을 보여주지 마세요. 가방은 꼭 붙들어 매고 다니시고요. 루이뷔통 가방은 집에 두고 오세요. 거리에 아이들이 무척 많습니다. 구걸하는 아이들을 정중히 무시하세요. 한마디라도 응수하면 즉시 벨크로(일명 찍찍이)로 돌변합니다.”
‘럭스 시티 가이드’ 캄보디아편에 적힌 내용이다. 캄보디아 남쪽의 해양 휴양지인 캄포트와 케프, 시아누크빌을 향해 출국하기 직전, 이 같은 글을 읽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앙코르와트가 아닌 캄보디아 ‘그 외 지역’에서 ‘외국인만 보면 돈을 노리고 구걸하는 아이들’을 빼면 즐길 만한 거리가 있긴 할까.
서울과 프놈펜을 오가는 직항 항공편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모두 밤에 떠나, 밤에 돌아온다. 프놈펜에서 남부 해안 도시로 가려면 육상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프놈펜에서 캄포트까지 버스가 오간다. 하지만 외국인, 특히 여성 여행자가 혼자 타는 것은 현지 주민들이 권하지 않았다. 호텔에서 택시를 부르면 기사가 딸린 전세 자동차를 불러 준다. 캄포트까지 가는데 45∼50달러를 받는다고 한다. 캄보디아에는 ‘리엘’이라는 화폐가 있지만 사실상 달러가 함께 통용된다. 하지만 잔돈은 리엘로 계산해서 준다. 1달러를 4000리엘로 계산했다.
캄보디아 대부분의 도로가 그렇듯이, 프놈펜∼캄포트까지 가는 길은 군데군데가 비포장도로였다. 캄포트에 도착해 취재진이 타고 온 전세버스를 살피니 진흙이 튀어 출발 전 미색이던 버스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캄포트는 후추 산지로 유명하다. 후추를 해산물 요리 등에 넣어서 볶는데 매콤하면서도 신선한 맛이 일품이다. 녹색 열매가 달린 줄기를 입에 넣고 알알이 달린 열매만 발라 먹는 재미도 독특하다. 만약 캄포트에 다시 갈 이유를 꼽는다면 첫 번째로 후추 요리를 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후추 농장 역시 캄포트의 주요 관광지 중의 하나다.
캄포트 보코르산은 캄보디아 정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도로를 닦는 등 개발이 한참이었다. 보코르산의 도로는 프랑스 식민 지배 시절 산 정상의 프랑스인 마을로 오가기 위해 건설됐다.
산 정상의 마을에는 1940년대 프랑스인들이 보코르산에 마을을 지어 살던 시절의 건물들이 폐허로 남아 ‘공포체험’ 관광지로 인기다. 이 마을은 수시로 안개가 끼는데, 건물이 통째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날 정도로 안개가 짙다. 할리우드 영화 ‘시티 오브 고스트’, 한국영화 ‘알 포인트’ 촬영지다. 보코르산뿐 아니라 캄포트 마을 곳곳에서는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절 건물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살림집으로 사용한다. 다시 허물고 지을 돈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여행 책자는 마치 유럽 시골 마을에 온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고 평가했지만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폐허에 가까운 곳이 더 많았다.
보코르산 정상 부근에는 ‘다섯 개의 배’라는 뜻의 ‘섬포 프람’ 절이 있다. 배 모양의 다섯 개 돌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이곳에 서면 태국 접경 지대까지 보인다. 안개가 휘감고 있는 빽빽한 정글 너머 바다의 모습이 절경이다. 담벼락에는 해풍이 만들어 낸 주홍색의 이끼가 껴 있었다. 바이언 TV의 랏 찬타 PD는 이를 ‘유령의 피’라고 불렀다. 보코르산에 오르는 도로 건설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캄보디아 인부 유령들이 흘린 피라는 설명이다.
○ 캄보디아의 ‘동해안’, 케프
케프의 상징은 ‘돌이 된 아내’ 석상이다.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남편이 폭풍우에 목숨을 잃은 줄도 모르고 계속 기다리다가 돌이 됐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촌 마을이면 으레 발견할 수 있는 망부석 전설이다.
망부석 근처는 석양을 볼 수 있는 케프 최고의 장소다. 저녁이면 주민들이 삼삼오오 나와 간식을 먹으면서 석양을 감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케프는 게로 유명해서, 삶은 게를 간식으로 먹는 사람이 많았는데, 한국 꽃게에 비하면 살이 많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1960년대 한국으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을 줬다. 군데군데 녹이 슨 데다 소리까지 요란한 철제 놀이기구에서 아이들이 깔깔대며 노는 모습을 보자 문득 어린시절 동네 놀이터에서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보통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결혼하는데, CIA 팩트북에 따르면 출산율은 평균 3명으로 높은 편이다. 열 살도 채 안돼 보이는 아이들이 동생을 돌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린 남자 아이들은 대부분 바지를 입지 않은 채로 다녔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종교(불교도가 95%) 때문인지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 선했다. ‘앙코르와트 그 외 지역’으로 출장을 다녀온 후배도 캄보디아 여행의 장점에 대해 “사람들이 착해요”라고 했었다. 그간 여행에서 ‘볼거리’라고 정의내린 범주가 시설물에서 사람까지 한층 넓어진 듯했다.
케프에서는 섬 피크닉도 유명하다. 배를 타고 15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토끼섬을 외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다. 파도가 높은 편이어서 배를 타고 가는 내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다. 멀미에 강하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멀미약을 먹어두는 편이 좋을 듯하다.
나루터에서 폭 20∼30cm의 오솔길을 따라 10여 분간 섬을 가로질러 걸어가자 해변이 나왔다. 섬의 반 정도가 해변으로, 해변을 따라 민박집과 식당이 죽 늘어서 있었다. 잘 꾸며진 해변은 아니다. 하지만 인공물을 거의 찾기 힘든 야생의 멋이 있다. 무엇보다 한가롭고 조용하다. 8달러를 내면 화장실이 딸려 있는 방갈로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다. 식사는 5달러 안팎에 음료는 1달러를 별도로 받았다.
바다의 색깔은 계절(9월) 탓인지 ‘남국’의 것과 달리 불투명하고 어두웠지만 새파란 하늘이 눈부셨다. 그늘 아래 나무벤치에 반쯤 누워 책을 펴고 눈을 감았다. 따뜻한 바람이 몸을 덮고, 거슬리지 않는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감쌌다. 캄보디아에 도착하기 전, 이곳에서 무엇을 기대했었는지 까맣게 잊었다. 그저, 참 평안했다.
글·사진 캄포트·케프(캄보디아)=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①사진을 찍으려고 몇걸음을 옮겼는데, 건물이 사라졌다. 바람이 지나자 안개가 걷히고 잠시후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1940년대 프랑스인들의 카지노로 사용됐던 ‘보코르 팰리스’ 건물 입구다. ②방갈로 숙박료는 하룻밤에 8달러였다. 화장실까지 딸려 있다. 현지 사람들은 주요 관광지에서 1달러면 하룻밤 묵을 수 있다. 상상 이하로 싼 가격은 캄보디아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이다. ③성수기(11월에 시작)가 되기 전이지만 토끼섬은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볐다. 이들은 야자수 아래 해먹이나 나무 벤치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