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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가 본 이 책]베토벤도 밀어냈다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모든 것… 말러,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른다

입력 | 2010-10-30 03:00:00

◇왜 말러인가?/노먼 레브레히트 지음·이석호 옮김/544쪽·2만5000원/모요사




‘난해하다’ ‘천박하다’는 입방아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던 교향곡 작곡가 말러가 음악회장에서 베토벤의 지위를 위협하거나 이미 넘어선 이유는 뭘까. 저자는 말러의 영향을 짙게 받은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범람, 하이파이 오디오의 발달 등 여러 이유를 들며 독자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에 대한 접근은 늘 엇갈린다. 음악 애호가들은 ‘난해하다’와 ‘천박하다’는 견해로 나뉘어 온라인에서 소모적인 전투를 벌이는 반면, 저널리스트는 팔짱을 끼고 말러의 음악이 왜 오늘날 이토록 이슈가 되는지 궁금해한다. 올해가 말러 탄생 150주년이고 내년이 서거 100주년이다 보니 그러한 논쟁은 더욱 격렬해지고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바로 그러한 질문, 즉 ‘왜, 말러인가(Why Mahler)?’를 아예 제목으로 내세운 저서가 출간됐다. 저자는 클래식 음악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노먼 레브레히트. ‘클래식 가십 컬렉터’, ‘고전음악 야사(野史) 제조기’라는 닉네임을 달고 있는 그가 풀어낸 말러 이야기들은 매우 도발적이다. 저자는 자신의 견해가 독자들에게 어떠한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이미 알고 있다. 어쩌면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 저서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말러가 베토벤마저도 밀어내고 가장 인기 있고 중요한 교향곡 작곡가로 취급받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어서’라는 데서 출발한다. 첫 장(章) ‘왜 말러인가?’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권좌에서 물러나기 직전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말러 교향곡 5번을 듣고 말러가 그린 갈등과 모순에 깊은 공감을 한 에피소드로 막을 연다.

범상치 않은 시작에 이어 저자는 말러의 인기에 대한 여러 가설을 내놓는다. ‘말러의 방언(方言)이라 보아도 무방한’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범람, 콤팩트디스크와 하이파이 기술의 발달, 인간의 내면을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담아낸 특유의 음악어법 등. 저자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여러 가설들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답을 내리기를 유도한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말러의 전기이다. 말러 당대의 사회상에 대한 치밀한 기술이 저자의 높은 식견을 보여준다. 다만 이는 통상적인 전기나 평전과는 그 궤가 완전히 다른데, 본문 곳곳에 저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 액자소설 혹은 막간극의 형태로 삽입되어 전기 속에 에세이와 기행문이 혼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중요 소재와 동떨어진 독립적인 섹션을 삽입하는 말러 특유의 교향적 작법(이른바 ‘에피소드’ 형식)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남편 말러의 삶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해 이류 로맨스 소설을 만들었다고 비난 받는 알마의 ‘회상록’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딱히 일관되지 않는다. 머리말에서는 ‘너무도 생생하고 예리하다’고 말하지만 교향곡 6번에 관한 부분에서는 ‘알마가 범한 모든 위증죄 가운데 단연코 가장 추잡하다’고 쓰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을 들자면 예상대로 음반비평에 관한 제3장 ‘누구의 말러인가’ 편이다. 균형 잡힌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데이비드 진먼, 조너선 노트의 말러 디스코그래피를 ‘담백하면 무조건 아름다운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의 추천목록’으로 일갈하는 장면에서 목적의식이 뚜렷한 해석을 선호하는 그의 취향을 읽을 수 있다. 이런 그의 견해는 ‘강력한 소수’처럼 보일 때가 있다. 통상적인 추천음반으로 꼽히는 음반들이 도마에서 난도질을 당하는가 하면 ‘소프라노가 성악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며 자신이 한때 최악의 음반으로 꼽았던 브루노 발터의 말러 교향곡 4번이 여기서는 모범적인 해석으로 올라 있다. 영국 오케스트라와 연관이 깊었던 지휘자, 예를 들어 클라우스 텐슈테트, 존 바비롤리, 야샤 호렌슈타인에 대한 열광적인 찬사에서 여전히 영국 비평가들의 ‘팔불출’ 기질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문체는 막힘이 없이 시원하며 교양음악 저서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술술 읽힌다. 이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페이지에나 저자의 해학과 풍자의식이 깃들어 있고 아포리즘(금언·金言)으로 택해도 좋을 명문장이 곳곳에 배치됐다. “말러는 우리 모두가 평론가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연주회장에 3000명의 청중이 운집해 있더라도 말러가 연주된다면 당신은 언제나 혼자이다”처럼 한쪽으로 빛나는 통찰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한다. 근거가 부족한 사견을 팩트(fact)인 것처럼 가공하여 독자의 혼란을 야기하는 레브레히트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들이다.

그 예로 말러의 교향곡 3번, 7번이 미래의 생태계 붕괴를 암시하며 교향곡 4번이 인종 간의 평등을 선언한다는 것은 비약이다. 말러의 키가 양말을 신고 재서 160cm였고 팝가수 비욘세 놀스가 말러의 4대손과 팔촌 관계라는 것까지 기재한 경악할 만한 디테일은 소위 ‘말러 광신도’의 관음증을 드러내는 불편한 문장일 수도 있다. 짐작하건대 전기 부분의 상당 부분이 ‘말러 전기의 성서’로 칭송 받는 앙리 루이 들라 그랑주의 저서 영향권 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랑주의 인물과 음악 분석을 피상적이었다고 평한 것은 온당치 않다. 저자의 과도한 자신감과 나르시시즘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은 말러의 교향곡 1번 ‘거인’이 작곡가 당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독자를 극렬한 팬 혹은 안티로 양분할 것이다. 작곡가가 ‘교향곡은 세계를 품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것처럼 레브레히트도 말러라는 이름 아래 펜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저자의 의견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더라도 그의 말러에 대한 열정과 집착만큼은 높이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레브레히트의 촌철살인과 독설을 이 시대의 감각에 맞게 옮긴 역자가 이 책의 숨은 주인공이라는 점도 밝혀둔다.

김문경 음악 칼럼니스트 ‘구스타프 말러’1·2·3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