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한스 켈젠 지음/책과사람들
《“어떤 다른 질문도 이처럼 열정적으로 논의되지 않았고, 어떤 다른 질문을 위해서도 그렇게 많은 귀중한 피와 통렬한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어떤 다른 질문에 대해서도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플라톤에서 칸트까지-그처럼 아주 골똘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있다.”》
저자는 정의를 ‘이익 또는 가치충돌의 해결 문제로서의 정의’와 ‘인간행동의 정당성으로서의 정의’로 나눈다. 사람들은 이익이나 가치가 충돌할 때 무엇이 더 정당한가, 정의에 부합하는가를 따진다. 결국 이때의 정의는 갈등이 생길 때 이를 해결할 만한 정당한 사회질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당한 질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사회 속에서 인간을 행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의다. 저자는 “정의란 사회적 행복이고 사회질서가 보장하는 행복”이라고 답한다. 이 경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될 수 있다.
정의는 어떤 사람의 행동이 정당한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가치는 상충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은 각 집단 내, 특정한 경제적 조건하에서 서로에게 미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 가치체계 역시 어느 정도 일치한다. 특히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은 이 같은 경향을 강화한다.
저자는 이 같은 논의를 바탕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의 정의론을 탐구한다. 또한 자연법 이론과 정의 개념의 관계를 탐구하며 정의에 있어서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를 비교한다.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법 앞의 평등’ 등 정의에 관한 여러 명제를 논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명제는 각자가 그의 것으로 간주해도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지 않기 때문에 공허하다는 식이다.
이 같은 논의를 통해 저자의 결론은 도입부 “인간은 결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로 돌아간다. “나는 상대적 정의로 만족해야만 하고 내게 있어 정의가 무엇인지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답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명쾌히 답하는 대신 읽는 이에게 자기 자신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자신에 있어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답한다.
“학문은 나의 직업이고 그래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학문, 그리고 학문과 함께 진리와 정직이 번창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그 정의를 말한다. 그것은 자유의 정의, 평화의 정의, 민주주의의 정의, 관용의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