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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實學연구에 私財70억 원 내놓은 이헌조 씨

입력 | 2010-11-10 03:00:00


LG전자 회장을 지낸 기업인 출신의 이헌조 씨가 사재(私財) 70억 원을 기부해 설립한 재단법인 ‘실시학사(實是學舍)’가 지난달 출범했다. 이 소식은 이 씨가 원치 않아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으나 최근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다산연구소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헌조 회장님’이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알려졌다.

‘실시학사’는 조선시대 실학(實學) 연구의 권위자인 이우성 전 성균관대 교수가 1990년 정년퇴임 이후 개인적으로 운영한 연구단체다. 수십 명에 불과한 실학 전공 학자를 결집해 국내 실학 연구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 씨는 한시(漢詩) 모임을 함께하던 이 교수에게서 ‘실시학사’가 문을 닫는다는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다. 그는 기부를 결심하고 이 단체를 재단법인으로 만들어 장기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이 씨의 기부는 지원이 절박한 학문 분야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실학 연구는 단절될 위기에 놓여 있다. 옛 문헌을 완벽하게 해독할 한문 실력을 갖춘 전공자가 극소수여서 올해 85세인 이 교수 같은 권위자가 타계하면 연구를 진행할 동력이 사라진다. 중고교 시절 누구나 역사수업에서 배웠던 실학의 연구 기반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인 것은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대기업의 사회공헌에서 인문학은 소외되다시피 했다. 경영학 공학 등 당장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분야에는 기부가 줄을 잇지만 우리 사회의 정신과 가치를 다루는 학문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다. 우리 사회에서 가치의 혼란으로 인한 비용이 큰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형성된 실학은 유학자들의 지나친 관념론을 우려하고,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학문과 민생을 향상시키는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창한 개혁적 학풍이었다. 실학자들의 시대정신은 당대에는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그 사상적 맥락은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과 일제강점기의 민족자강(自强) 세력, 광복 이후 산업화 세력으로 이어져 오늘날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연결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중도 실용도 그 원류를 따져보면 실학에 다다르게 된다.

이 씨의 지원으로 용기백배한 ‘실시학사’는 번역 출판 사업, 학술상 제정 등 다양한 활동을 펴겠다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 씨는 재단 출범식에서 “실학 연구가 냉각되고 있는 현실을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의 뜻 깊은 기부를 계기로 또 다른 후원이 인문학 분야에서 이뤄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