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시절 북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지 못할 경우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습을 감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중국에 경고했던 것으로 9일(현지시간) 밝혀졌다.
부시 전 대통령은 이날부터 시판에 들어간 자서전 '결정의 순간들(Decision Points)'에서 "2003년 2월 나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장쩌민 중국 주석에게 '우리가 이 (북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지 못할 경우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습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 우라늄을 통한 핵개발에 나서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된 뒤인 2002년 10월 당시 장 주석을 자신의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에 초청해 가진 정상회담에서 북한 문제를 제기하며 "이것은 미국 뿐 만 아니라 중국에 대한 위협"이라면서 공동대응을 요청했지만 장 주석이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행사는 매우 복잡한 문제"라면서 사실상 거부했다고 전하면서 이 같은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이후 몇 달 뒤부터 자신이 다른 논거를 주장하기 시작했다면서 2003년 1월에는 장 주석에게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이 계속되면, 일본의 핵무기 개발을 멈추도록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자서전에서 북한 문제가 2001년 3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자신의 취임 후 첫 번째 국가안보회의 의제에 올랐음도 소개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당시 자신의 국가안보팀에 "김정일을 다루는 것은 나에게 애들을 키우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고 말했다면서 자신의 두 딸들이 관심을 끌기 위해 음식을 바닥에 던져 부인인 로라 여사와 자신이 뛰어가서 이를 다시 주워 담았던 사실을 거론했다고 전했다.
그는 "딸들은 다음에도 관심을 끌길 원할 때 음식을 다시 던졌다"면서 "미국은 줄곧 그(김정일)의 음식을 주워 담고 있다"고 국가안보팀에 말했다고 밝혔다.
그는 2006년 7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사실을 거론하면서 "김정일이 바닥에 다시 음식을 던졌다"고 표현한 뒤 "김정일은 세계가 이란에 집중된 것을 보고 관심을 모으기 위해 그 일을 한 것이라는 게 나의 이론"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취임 후 대북정책 방향과 관련, "전 정권들은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에게 핵 포기 선언의 대가로 양보를 제안했지만, 이런 정책은 효과가 없었다"면서 "나는 이를 변경시킬 것이라고 국가안보팀에 말했고, 그 이후부터 미국이 양보를 하기 전에 북한은 행동을 변화시켜야만 했다"고 전했다.
그는 재임시절 읽은 책 중 가장 영향력을 준 책 중 하나가 탈북자 출신인 강철환 씨가 쓴 '평양의 수족관'이라는 책이었다면서 "강씨의 얘기는 수많은 인명을 죽인 독재자 김정일에 대한 나의 깊은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영양 부족으로 북한주민들이 남한보다 평균 3인치 키가 작다는 정보보고도 읽었고, 자신의 취임 전 6년 동안 100만 명이 기근으로 숨졌다는 추정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또 김정일에 대해 좋은 코냑과 고급 벤츠차, 외국 영화를 좋아하는 인물로 묘사하면서 북한 주민들에게 마치 신과 같은 지도자로 그를 숭배하도록 했다고 비난했다. 북한의 선전 매체들은 김정일이 날씨를 마음대로 조정하고, 6개의 유명한 오페라를 만들었다는 등의 사실을 홍보하기도 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그는 대북정책과 관련, "단기적으로는 6자회담이 김정일에 대한 레버리지(지렛대)를 유지하고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제거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보여주지만, 장기적으로는 유의미한 변화를 위한 유일한 길은 북한 주민들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 밖에 그는 이 자서전에서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대 콜린 파월 국무장관으로 대변되는 자신의 외교, 안보팀 내에 불화가 심각했던 사실을 인정하면서 "2004년 봄에는 국가안보팀 내의 불화에 대한 나의 인내가 끝이 났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초 창의적 긴장으로 시작됐던 것이 파괴적으로 변했다"면서 "(외교안보팀 내의) 반감은 너무 깊었고, 유일한 해결책은 2004년 선거 이후 국가안보팀 전체를 교체해야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었다"고 말했다.
그는 비둘기파로 알려졌던 파월 전 장관에 대해 "파월을 존경하지만, 그가 이끄는 국무부는 나의 철학 및 정책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고 전하면서 당시 파월이 일찌감치 사의를 표명했고, 후임으로 콘돌리자 라이스를 염두에 뒀음을 전했다.
이와 관련, 그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대북정책을 준비하던 2001년 3월 어느날 새벽 5시15분 경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 미사일 프로그램협상을 끝낸 곳에서 부시 행정부가 협상을 시작할 의향이 있다는 요지로 파월 장관이 말했다'는 워싱턴포스트지 기사를 보고 "경악했다"면서 "이는 그 전날 우리가 회의에서 했던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얘기였다"고 파월에 대한 불만도 드러냈다.
반면 당시 그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이를 수습하는 역할을 맡겼다면서 라이스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자서전 곳곳에서 드러냈다.
인터넷 뉴스팀
▲동영상=김정은 시대... 북핵 책임자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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