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가 요부라고? 그녀는 현실정치의 대가였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기억되는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는 빼어난 외모로 영웅들을 혼미케 한 당대 요부의 모습이다.
그러나 2000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전기 작가이자 뉴욕타임스의 객원 칼럼니스트인 스테이시 시프는 ‘클레오파트라가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남성을 유혹한 미인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나라를 살리기 위해 탁월한 선택을 거듭했던 정치가는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이를 풀기 위해 사료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에서 출간한 ‘클레오파트라: 어느 인생(Cleopatra: A Life)’은 이런 그의 노력이 낳은 결과물이다.
더구나 우리가 아는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인들이 승자의 관점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다. 또 이들은 모두 남자였다. 영웅전을 쓴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가 클레오파트라 사후 1세기 뒤에 그를 직접 본 목격자들의 증언들을 모아 쓴 글이 그나마 가장 사실에 근접한 자료다.
이 때문에 시프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어떤 모습이 어떤 자료에 따른 사실이며 어떤 모습이 픽션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인지’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 딸로 태어나 18세 때 15세였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면서 공동 파라오의 자리에 올랐다. 이집트 왕실은 형제간의 결혼을 통해 왕실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실패와 성공에 대해 철저하게 연구하며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고 최소 9개 언어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이었다.
시프에게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꿈을 나눈 정치적 동지다.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해 악티움 해전을 결행하고 패배하기까지 두 사람은 새로운 제국의 건설을 함께 꿈꿨다.
시프는 “클레오파트라의 시대에는 결혼이 정치와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였다”며 “자신의 남자들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분명 현실정치의 대가였다”고 강조한다.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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