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軍을 신뢰할 수 있을까
유낙준 해병대사령관이 조문을 마치고 눈물을 닦는 사진 뒤엔 거친 비판까지 붙어 있다. “이제 국민은 사망자 앞에서 조문하며 슬퍼하는 군인을 보고 싶지 않다.” “대통령이나 사령관이나 질질 짜는 꼴이니 국방이 이 모양이지.”
인식(認識)이 사실을 이긴다고 했다. 대통령이 북의 연평도 공격 이후 첫 메시지로 “확전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라”고 했든 안했든, 국민의 머릿속엔 이미 제 국민과 영토 보전보다는 전쟁을 더 우려하는 대통령으로 각인돼 버렸다.
우리만의 오해가 아니다. 영국 BBC도 영국 시간 23일 오전 7시 32분 “이명박 대통령은 ‘단호히 대처’하되 또한 ‘상황이 악화되지 않게’ 확실히 하라고 촉구했다”고 전했다. 오보 탓할 것 없다. 대통령의 메시지를 몇 번씩 바꿔 내보낸 것부터가 무능의 소치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전방은 괜찮으냐”고 첫마디를 던졌다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일관된 메시지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위기 자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아니 어떻게 대처한다고 인식되느냐가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좌우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두 번의 호기를 놓친 대통령을 신뢰할 수 있을지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천안함 사태 뒤 5·24 담화에서 대통령은 분명히 다짐했었다. “앞으로 (북한이) 우리의 영해, 영공, 영토를 무력 침범한다면 즉각 자위권을 발동할 것”이라고. 어제 다이빙궈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에게도 대통령은 “북한이 추가 도발해 온다면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사실상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냉철하게 따지면 대통령이든 경질된 국방비서관이든 ‘이번엔 확전을 피하고 다음엔 가만있지 않는다’고 한 메시지가 잘못됐다고 하긴 어렵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전면전을 원하는 국민이 많지 않은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벙커에서 나와 국민과 함께하라
문제는 이젠 3·26 천안함 사태가 그럭저럭 지난 뒤 우리가 돌아갔던 평온한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순 없다는 사실이다. 분쟁지역 관련 저자로 이름난 로버트 캐플란은 “정권의 유지에만 사로잡힌 북은 인민을 경제개혁 아닌 끝없는 전쟁태세로 몰아세울 수밖에 없다”고 최근 파이낸셜타임스에 썼다. 연평도 도발에서 우리의 약한 모습을 또 한번 확인한 북은 수시로 김정은의 영광을 위해 도발할 것이고, 북을 감싸온 중국은 헤게모니를 잡은 듯 경제력 군사력과 자신감을 과시하기 시작했으며, 미국은 거꾸로 경제적 정치적 위력과 함께 국방예산도 떨어져 가는 상황이다.
어쩌면 과거 정권처럼 제발 가만히 있어 달라고 김정일의 대를 이어 김정은 정권에까지 뇌물을 바치거나 북이 붕괴 또는 개과천선하지 않는 한, 지금까지 우리가 누리던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는 기대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57년째 전쟁이 끝나지 않은 분단국 국민으로 살면서도 잊고 지내온 북의 위협을 이제야말로 뼈저리게 느껴야 할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고 민간인 남녀노소가 모두 무장(武裝)을 할 순 없고 믿을 데는 미우나 고우나 군과 정부뿐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우선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나와 국민 앞에, 국민과 함께 서주기 바란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