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말을 트윗하는 팔로어 여러분, 저는 어느 세계에 있는 걸까요?
폭주를 통해, 혹은 춤을 통해 우리 젊은이들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주변의 관심과 애정이다. 다른 사람들은 무시해도 좋다. 같이 폭주를 하거나 함께 힙합을 하는 동료들에게서 애정과 관심을 얻을 수만 있다면 타인의 시선은 무시해도 좋다. 어쩌면 이들은 행복한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알량하지만 최소한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동료마저도 없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로부터 관심과 애정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들도 학교나 직장에 다니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학교나 직장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주고받는 애정과 관심은 그들을 충족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수 있는 동료들을 찾아다닌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컴퓨터의 사이버공간이다. 가상공간에서 그들은 미니홈피나 블로그 속에 거주한다. 자신만의 주거공간을 아름답게 꾸며 동료들을 유혹하고, 그들로부터 애정을 받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들의 구애행각을 가만히 놔둘 자본이 아니다. 마침내 자본은 외로운 그들에게 ‘TGiF’로 상징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T는 트위터(Twitter), G는 구글(Google), i는 아이폰(i-phone), 그리고 F는 페이스북(Facebook)의 약자다. 과거 미니홈피나 블로그와는 달리 SNS는 글자 그대로 실시간 네트워크라는 그물망조직을 제공한다. 새로운 구애공간이 만들어지자마자 새로운 입주자들이 앞다투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스마트폰으로 활성화된 SNS에 도취되어, 이 네트워크가 전제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는 인간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불변이기 때문이다. 파스칼(1623∼1662)이 보았던 인간의 허영☆도 바로 이 욕망과 다름없다.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랫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 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팡세(Pens´ees)’
데카르트가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동시대 파스칼은 인간에게서 전혀 다른 것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기보다는 무엇보다 먼저 허영의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부처럼 못 배운 사람이건 아니면 철학자처럼 지혜로운 사람이건 예외가 없는 사실이다. 허영의 의미는 ‘vanity’라는 영어 표현보다 ‘虛榮’이란 한자 표현이 더 예리하게 전해준다. 실제가 아니라는 의미의 ‘허(虛)’와 화려하게 꽃핀 모양을 뜻하는 ‘영(榮)’으로 구성된 글자다. 그러니까 허영은 실제가 아닌 화려함이란 뜻을 가진다. 뚱뚱한 사람은 건강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못생긴 사람은 마음이 곱다는 말을 원한다. 성적이 낮은 학생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실제가 아닌 화려함, 즉 허영이 현실화된 공간이 바로 SNS 속의 가상세계 아닐까. 화려하게 장식된 가상공간은 자신을 찬양해줄 사람들을 유혹하려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SNS를 상징하는 트위터에 들어가본 적이 있는가. 여기서 ‘팔로어(follower)’라는 낯선 단어를 접하게 된다. 자신이 거주하는 가상공간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파스칼의 용어를 빌리자면 ‘자신을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인 셈이다. 팔로어가 많을수록 우리의 허영은 충족될 것이고, 반대로 팔로어가 줄어들거나 없어지면 우리는 좌절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의 추종자를 거느린 유명 인사들에 국한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단지 자신이 누구의 추종자인지를 자랑하는 것으로 자신의 허영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을 보라. 유명 인사와 잘 안다고 떠벌리며 뿌듯해하는 불쌍한 동료가 몇 명은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불쌍한 사람들도 언젠가 팔로어를 거느리는 유명 인사가 되기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인정 행위 속에서 나는 개별자가 아니다. 나는 당연히 인정 행위 속에서 존재하며, 더는 매개 없는 현존재가 아니다. (…) 인간은 필연적으로 인정받으며, 필연적으로 인정하는 존재다. (…) 인간 자체는 인정 행위로서의 운동이다. -‘예나 시대의 실재철학(Jenaer Realphilosophie)’
헤겔의 이야기를 읽으면 정신분석학이나 최근 진화론 연구가 공통적으로 전해주는 한 가지 가르침이 떠오른다. 그것은 인간이란 타자의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통찰이다. 옳은 지적이다. 사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는커녕 가장 나약하고 여린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갓난아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걷지도 먹지도 못한 채 몇 년을 보내야 한다. 부모나 타인의 도움이 없다면,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도 버겁다. 당연히 갓난아이에게 주변의 관심과 애정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사활을 건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갓난아이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어른들이 학연이나 혈연, 그리고 외모 등등에 연연하는 것도 모두 타인으로부터 손쉽게 관심과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인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 자신을 부단히 매혹적인 존재로 만들려는 존재다. 이것이 바로 개인의 성장과 변화의 동력 아닌가. 난해하다던 헤겔의 변증법은 이런 생각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세계에서 자신을 매혹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나아가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동료들이 매혹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위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상세계에서 자신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상세계에서는 실제로 자신을 바꿀 노력도 크게 필요하지 않고, 아주 간단히 자신의 매력을 다르게 변경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폭주족의 광란의 질주나 힙합족의 무아지경의 춤사위가 오늘도 스마트폰의 작은 자판을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동작과 오버랩되지 않는가. 이제 SNS가 마련한 가상세계 위에 전개되는, 네트워크를 종횡무진 횡단하는 질주나 춤사위를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더디고 위험하지만 현실세계에서 타자와 직면해 과감하게 인정 투쟁을 벌이는, 당당한 삶의 자세를 다시 추스르기 위해서 말이다.
:허영(vanity)☆::
인간은 실제 자신의 모습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허영이다. 문화나 문명이 가능한 것도 어쩌면 인간의 허영 때문은 아닐까. 서양의 파스칼(1623∼1662)은 이런 인간의 모습에 절망했던 철학자였다. 그는 인간이 허영을 극복할 수 없다고 비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만이 인간을 허영에서 구제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와 달리 우리의 철학자 정약용(1762∼1836)은 허영으로부터 인간이 윤리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읽어낸다. 그에 따르면 도둑도 정직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좋아한다. 허영이다. 그렇지만 이로부터 도둑도 언젠가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정약용의 생각이었다.
인정 투쟁(Kampf un Anerkennung)☆☆
호네트는 인간을 타자에게 인정 받으려고 투쟁하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인정투쟁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등장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인과 노예가 있다. 외적으로 분명 주인은 노예에게 주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지만 노예의 인정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참다운 인정을 받기 위해 주인은 노예를 자유로운 인격으로 해방시켜야만 한다.물론 해방된 노예는 이전의 주인을 인정하기는커녕 주인에게서 도망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주인은 노예에게 자유를 줄 수밖에 없다. 오직 그럴 때에만 노예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나마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정을 둘러싼 인간의 투쟁은 자신의 기득권마저 버리게 할 정도로 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