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 한목소리로 현대그룹 압박
현대그룹과 우여곡절 끝에 현대건설 매각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채권단이 각종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현대건설 인수자금을 규명하기 위해 현대그룹을 압박하고 나섰다. MOU 체결 직전까지만 해도 서로 딴 목소리를 냈던 채권단의 외환은행과 한국정책금융공사가 1일에는 각각 프랑스 나티시스은행 예치금 1조2000억 원, 동양종합금융증권 자금 8000억 원의 실체를 철저히 규명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채권단이 이처럼 강경 방침으로 돌아선 것은 MOU만 체결하면 인수자금 증빙자료를 제출하겠다던 현대그룹이 정작 MOU를 체결한 뒤 미묘한 입장 변화를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 현대그룹은 채권단과 MOU를 체결한 뒤 1조2000억원에 대한 증빙서류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자 “구체적인 제출 서류와 몇 영업일 내에 제출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MOU에는 없다”며 채권단을 자극했다. 급기야 채권단은 이 같은 현대그룹의 대응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전날에 이어 이틀 연속 운영위원회를 열고 더욱 강경한 메시지를 던졌다.
채권단 주관기관인 외환은행이 MOU가 해지되면 현대건설을 인수할 수 있는 권리가 예비협상대상자인 현대·기아자동차그룹 컨소시엄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고 밝힌 것에 대해 현대그룹을 압박하기 위해 최후의 카드를 빼들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금융권에선 ‘MOU가 해지돼 현대그룹이 탈락하면 현대차그룹도 같이 떨어져 매각 과정이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란 전망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채권단은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시장 일각의 전망을 뒤집는 공식 반응을 내놓은 것이다.
채권단이 이처럼 강경 대응에 나선 또 다른 배경에는 정치권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등 시민단체들이 일제히 현대그룹의 인수자금을 둘러싼 의혹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점도 영향을 미쳤다.
또 정책금융공사가 동양종금 자금에 대해 추가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동양종금이 8000억 원에 이르는 거금을 투자하면서 입찰일까지도 풋백옵션(투자수익보장장치)을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인수합병(M&A) 관행상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채권단의 판단이다.
현대그룹 “자료제출 법률 검토”
이에 대해 현대그룹은 “증빙 제출 요구에 성실히 응하겠다는 기존 입장에 변함이 없다”며 “나티시스 은행과의 계약관계상 비밀유지조항이 있어 채권단이 요구하는 모든 자료를 제출할 수 있는지 법률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