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집으로 출근하면 자연히 올해 아흔이신 아버지와 여든일곱이신 어머니를 뵙게 된다. 예전에는 그냥 뵙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청소를 해드리면 되었는데, 요즘은 아들로서 꼭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던 아버지를 목욕시켜 드리고 손발톱을 깎아드리고 이발소에 모셔가는 일 등을 해야 한다.
처음엔 귀가 어둡고 한쪽 눈조차 실명된 아버지를 일상으로 대하는 일이 짜증도 나고 시간이 아깝기도 했다. 노인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당신의 입장만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면이 있고,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않는 의존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하려고 해도 이미 육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시인 말라르메의 이 시구가 늙은 부모의 허물어진 육체를 볼 때마다 가슴을 때린다. 아버지를 처음 공중목욕탕에 모시고 갔을 때 마치 구부러진 녹슨 못 같은 아버지의 육체를 보고 받은 충격은 크다. 만지면 부서져버릴 것 같은, 다 타버린 종이 위에 간신히 가는 나뭇가지를 세워놓은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여전한 부모님의 내리사랑
그래도 그런 아버지가 시작노트가 든 가방을 들고 밤늦게 퇴근하는 나를 보고 “조심해라! 걸어가지 말고 차 타고 가라!” 하고 말씀하신다. 돌다리를 건너는 예순의 아들을 보고 아흔의 아버지가 조심하라고 한다는 옛말이 조금도 그르지 않다. 언젠가 힘든 일을 겪고 어깨가 축 처져 퇴근하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현관까지 지팡이를 짚고 따라 나와 “힘 내거라” 하고 위로해 주셨을 때 집에까지 걸어가는 동안 ‘내가 불효자구나’ 싶어 눈물이 났다. 이제는 거실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손을 흔드는 아버지의 구부정한 모습을 보면 내일 아침에 살아계신 저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마다 ‘천년을 함께 살아도 한 번은 이별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린다. 죽음은 죽음 그 자체도 두렵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기에 더 아프고 두려운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지금까지 부모님 사랑의 힘으로 살아왔다.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는 어머니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도 어머니는 다 받아들인다. 어머니의 사랑이 그만큼 깊고 크고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신의 사랑에도 모성적 측면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모성의 본질이 희생이라면 희생 없는 사랑은 없다.
내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안 먹는다고 해도 아침마다 내 몫으로 꼭 고구마 두서너 개를 더 삶아 놓고는 “고구마 안 먹나?” 하는 말을 하루 종일 듣기 싫을 정도로 하신다. 어쩌다 설거지를 해드릴 때도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놔둬라,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하신다.
내 어머니는 남은 치아가 하나도 없다. “돈은 없는데 자꾸 치료하러 오라고 해서 그냥 참다가 나중에 하나씩 빼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어머니가 통증이 심한 치아 사이를 껌으로 때워놓은 것을 보고 치과에 가시라는 말만 했다. 자식이란 부모가 아파도 그런 말만 하는 존재다.
나는 요즘 미장원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허리를 다친 뒤 그만 등이 굽어버린 어머니를 등 뒤에서 꼭 껴안아보기도 한다. 어떤 때는 짓궂게 어머니의 야윈 가슴을 슬쩍 만져볼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어머니가 “얘가 미쳤나!” 하고 질겁하면서도 그리 싫어하시는 기색은 아니다.
사랑과 감사로 보답하는 연말을
올 한 해도 늙은 부모의 사랑으로 내 인생은 이루어졌다. 미국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는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소망한다는 의미로 앙상하게 죽은 나무를 크리스마스트리로 세워놓는다고 한다. 내 부모님도 죽은 나무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와 마찬가지지만 이제 곧 새로운 생명과 사랑을 싹틔울 것이다.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