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북한이 저지른 아웅산 테러로 순직한 김재익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의 부인인 이순자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전 재산 20여억 원을 서울대에 기탁하겠다고 약속했다. 서울대는 이들 부부의 모교다. 이 교수는 사후(死後)에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서울대에 기증하기로 했다.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절약해 모은 돈을 남편의 이름으로 기부하는 것이다. 이 교수의 한 제자는 “이 교수님은 ‘둥굴레차 티백을 세 번은 우려먹을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알뜰하게 사시는 분”이라고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이 교수는 서울대에 전한 글에서 “6·25전쟁 이후 지독히 가난했던 한국의 젊은이들은 선진국의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며 “이제 우리보다 불우한 나라에 힘을 보태는 것이 우리나라의 위상에 맞는 일일 것”이라고 적었다. 김 전 수석은 미국 정부의 장학금으로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해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재익 장학금은 그가 받았던 혜택을 과거 우리와 같은 처지인 개도국 공무원에게 돌려준다는 의미가 있다.
▷서울대는 기부금으로 ‘김재익 펠로십 펀드’를 조성해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의 젊은 학생과 공무원들이 서울대에서 경제 정책을 배울 수 있게 지원하기로 했다. 개발정책학 석사과정에 매년 20명가량의 개도국 공무원을 초청하는 서울대는 김재익 장학금으로 초청 인원을 늘릴 계획이다.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선진국들은 개도국의 개발 노력을 적극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김재익 장학금은 개인 차원에서 G20과 같은 방향의 사업을 벌이는 것이다.
▷김 전 수석은 우리나라 개발 초기의 정부 주도형 경제정책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다고 본 관료였다. 그는 일찌감치 정부규제 철폐와 시장개방, 국제화 등을 외쳤다. 석유파동으로 물가가 급등하자 안정화 정책을 펼쳤다. 시장경제 금융실명제 부가가치세 금리자율화와 특혜금융 철폐 등 지금 보면 당연한 것 같은 주요 정책들이 그의 머리와 손에서 추진됐다. 개도국이 개발과 성장에만 주력하다 보면 소홀히 하기 쉬운 글로벌 스탠더드들이다. 아쉽게도 그는 한국의 고도성장과 물가안정, 경상수지 흑자 행진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김재익 장학금으로 한국에 오는 개도국의 젊은이들이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경제정책과 함께 김 전 수석의 경제 철학까지 배워 간다면 좋겠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ry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