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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인철]불탄 철모와 녹슨 해안포

입력 | 2010-12-06 03:00:00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이 벌어진 뒤 현장에 급파된 취재기자들이 보내온 연평도의 해안포 르포 기사와 사진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군이 ‘연평도는 목구멍의 비수요, 백령도는 옆구리의 비수’라며 서해5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해온 터라 연평도는 당연히 최첨단 무기와 요새화된 최강의 군부대가 지키고 있는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6·25전쟁 때 쓰던 M-47 전차를 퇴역시키면서 떼어낸 90mm 포를 배치한 것이 연평도 해안포다. 사정거리는 1km밖에 안 돼 북한군이 코앞에 와야 겨우 사정권에 들어온다. 고물 해안포 배치도 놀라웠지만 그나마도 포신에 시뻘겋게 녹이 슬고 볼트는 풀려 있고, 기름이 줄줄 흐를 정도로 방치해온 군 운용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아무 일 없이 지내온 게 용하다. 북한의 기습 포격에 우리 해병대가 13분 만에 K-9 자주포로 80여 발을 응사했지만 대포병레이더와 자주포 6문 중 3문이 고장이 났고, 포탄도 목표물을 정확히 타격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와중에 휴가를 떠나려다 되돌아오던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이 전사했고 민간인 2명이 아깝게 희생됐다.

연평도 포격 도발로 대한민국 안보태세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 앞선 경제력과 최첨단 무기를 내세워 도발 즉시 초토화시키겠다던 군 지도부는 나약함만 드러냈다. 천안함 폭침으로 46명의 장병이 희생된 지 얼마나 됐다고 민간지역까지 무차별 포격하는 북한군을 즉각 응징하지 못해 국민에게 좌절감을 안긴 대통령과 군 지도부, 이렇게 ‘물렁 군대’로 만들어놓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정부가 뒤늦게 K-9 자주포를 더 투입하고 다연장로켓포를 새로 배치하는 등 전력 증강을 서두르고 있다. 해병대가 20년 넘게 목이 아프게 전력 강화를 요구했지만 번번이 묵살당했다고 한다. 육군 중심의 군 운용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는 찬밥 신세였고, 헬기 한 대 없어 해군도 아닌 해경의 신세를 지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연평도의 병력을 감축할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햇볕정책을 내세운 좌파정권 10년 동안 군은 주적(主敵) 개념을 없앴고, 북한의 눈치를 보며 교전규칙 운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해안포만 녹슨 게 아니라 국민 안보의식도 야금야금 좀이 슬었다. 북한을 비판하는 사람은 ‘수구꼴통’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군 장교가 되겠다는 육군사관학교 가(假)입교생들조차 34%가 ‘우리의 주적’으로 미국을 꼽았고 북한이란 응답자는 33%에 불과했다니 말이다.

그렇지만 포탄이 터지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철모에 불이 붙고 입술에 화상을 입은 줄도 모르고 대응 포격에 나선 젊은 해병들의 투철한 군인정신은 한 가닥 위안을 안겨준다. 휴가 중이던 해병대원 1500여 명이 즉시 부대로 복귀했다. 연평도 도발 이후에도 해병대에 지원자가 몰리고 있다니 그래도 희망은 있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새로 취임했다. 매서운 눈초리와 도발에는 단호하게 응징하겠다며 확실히 맺고 끊는 자세가 모처럼 속 시원하게 느껴진다. 애매모호한 수사(修辭)를 늘어놓으며 뺀질대던 전임과는 확실히 대비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장군부터 확고한 정신력 확립이 필요하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고 군에 주문했다. 이제 군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강군으로 거듭나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인철 사회부장 inchu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