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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아비 폭력 먹고 자란 ‘야수 아들’의 절규

입력 | 2010-12-07 03:00:00


가정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진정한 사랑의 회복을 꿈꾸는 극단 전망의 연극 ‘사랑이 온다’. 아비의 무차별적 폭력을 견디다 못해 가출했다가 15년 만에 돌아온 아들(김수현)이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박경근)를 맹수의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사진 제공 극단 전망

극예술의 심층적 감동은 어디서 오는가. 생물학 용어를 빌리면 계통발생과 개체발생이 겹치는 지점에서 발원한다. 계통발생은 인류 전체의 보편적 발전 과정을 말한다. 개체발생은 개별 인간의 성장 과정을 말한다. 이 둘이 교차하는 지점이란 인류의 집단무의식(또는 유전자)에 깊이 새겨진 원초적 경험과 개개인이 성장 과정에서 겪게 되는 상처가 공명하는 지점을 말한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이런 메커니즘을 읽어냈다. 대표적인 것이 신화 속의 친부 살해와 어린 시절 겪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유사성을 조명한 것이다. 인류 문화의 기원에 아버지에 대한 집단살해와 그에 대한 죄의식이 숨어있다면서 이를 ‘초석(礎石)적 살해’로 명명한 것도 프로이트였다.

1∼5일 서울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공연된 극단 전망의 ‘사랑이 온다’(배봉기 작, 심재찬 연출)는 이 ‘초석적 살해’의 신화적 구조를 전복한다.

작품의 앞부분은 김영하 원작소설을 극화했던 ‘오빠가 돌아왔다’(고선웅 각색·연출)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박경근)의 폭력에 시달리다 15년 전 가출했던 아들(김수현)이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돌아온다. 얼마 전 반신불수가 됐지만 여전히 폭군 행세를 하는 아버지를 견디며 살아온 어머니(길해연)는 가슴이 설렌다. 그러나 아비의 폭력을 저주하던 아들은 어느새 아비를 닮은 짐승이 돼 있었다. 아비가 어미를 대하듯 사랑하는 여인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던 아들은 아비를 향해 절규한다.

“당신이 날 미치게 만든 거야. 다섯 살도 안 되었을 때부터 10년이 넘게 악마 같은 짐승 새끼를 내 속에 심었어. 집 나가 15년 동안 이 짐승 새끼와 싸웠어. 그래도 안 돼. 이 짐승 새끼는 원래 주인을 죽이기 전에는 안 죽어. 그 주인이 먹여 키웠거든.”

그는 자신에게 끔찍한 씨앗을 심은 아비를 죽여서라도 그 악순환을 끊어내겠다고 선언한다. 늙은 아비는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지르고, 억장이 무너진 어미는 온몸으로 괴물이 된 아들을 막아선다.

‘오빠가 돌아왔다’가 가정폭력을 희화화한 블랙코미디라면 ‘사랑이 온다’는 그 소름끼치는 심연을 응시하는 비극이다. 비극성은 반복을 통해 강화된다. 아들의 방문은 세 차례 이뤄진다. 그때마다 동행하는 여인이 바뀌고, 자신 안의 짐승과 싸우느라 아들의 몰골은 갈수록 피폐해진다. 그와 더불어 아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심정은 아들이 아비보다 더한 괴물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어미의 처절한 그것으로 바뀐다.

무엇으로 이 지긋지긋한 폭력의 대물림을 끊어낼 것인가. 연극은 용서와 화해를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대신 문신처럼 새겨진 폭력의 독소를 제거하려면 그보다 더 길고 고통스러운 해독 과정이 필요함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정화가 이뤄졌다고 믿는 순간 ‘초석적 살해’가 뜻밖의 방식으로 벌어진다. 관객은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거기엔 가정폭력에 희생된 개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치유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가부장적 폭력의 신화적 치유에 대한 희구가 담겼다. 계통발생이 개체발생으로 반복되는 ‘초석적 살해’를 ‘최종적 희생’으로 종식시키고 싶은 작가의 희구가. 1시간 20분밖에 안 되는 짧은 연극이 가슴 먹먹한 감동을 안겨주는 이유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끔찍이도 미워했던 폭력의 대물림에 몸부림치는 아들 역을 연기한 김수현 씨의 연기는 올해 발견한 최고의 연기였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