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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박재창]차라리 국회가 예산을 짜라

입력 | 2010-12-10 03:00:00


나라라고 해서 다 같은 나라가 아니고, 민주주의라고 해서 다 같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국격을 논하고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 같다. 국격을 높이기 위해 브랜드위원회를 두었고 민주주의를 심화하기 위해 범정부적으로 민주시민교육에 나선다는 말도 있었다. 나라의 품격을 이미지 관리로 제고한다는 발상도 기막히지만 전운이 감도는 비상사태 속에서도 난장판 국회를 여는데 무슨 놈의 민주시민교육이 되겠는가. 역행보살도 이 정도면 메달감이다.

거수기 노릇에 싸움만 반복

국가비상사태에 영미권의 젊은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장에 자원입대한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런 애국심은 지킬 가치가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대표 없이 세금 없다’는 말은 영국에서 처음 나왔다. 자기 맘대로 전쟁을 일으켜 프랑스에 대패하고 돌아온 당시의 존 왕을 압박해 귀족이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대헌장이 마그나카르타다. 여기에서 의회의 효시가 마련됐으며 국왕일지라도 국민대표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지 못한다는 원칙이 생겼다.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이 동의하지 않으면 예산을 세우지 못하고 그에 따라 세금도 걷지 못하는 나라라면 누군들 지키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겨나지 않겠는가. 몸싸움과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내년도 예산안이 전격 통과되었다. 국민의 대표가 조정과 타협으로 속 깊은 심의도 다하지 못했는데 예산안이 강제 통과되었다면 대표 없이 세금 걷겠다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니 세금이라면 나라가 조세정책으로 빼앗아가는 내 호주머니 돈이라고 생각함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 세금이라면 숨겨 조금이라도 덜 빼앗기는 것이 장땡이고 지혜로운 일이다. 우리나라 조세면탈범이 대체로 죄의식이 약한 이유다.

국회가 예산심의하다 말고 파행 속에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거대 여당이 등장하면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지난 3년 연속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켰으며 올해까지 8년 연속 법정 시한(12월 2일)을 넘겼다. 여야가 합의해 처리한다고 해도 사실상 국회의 예산심의는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가 하는 일이란 정부가 제안한 예산안을 검토하고 가감 첨삭하는 일이다. 제헌 이래 평균 0.6% 내외의 원안수정이 있었을 뿐이다. 방대한 정부 원안을 국회가 심의하는 기간은 고작 2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정부 원안에 거수기 노릇을 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예산안에 대한 여야 간 합의의 도출이 지난한 이유는 간단하다. 예산안을 국회가 편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야가 처음부터 자기의견을 놓고 조정하거나 타협할 시간적, 정치적 공간이 부족하고 특히 정부 예산안은 대통령 것이라는 인식이 대통령을 지키려는 여당과 이를 저지하려는 야당 간의 갈등을 촉발한다.

美선 2년 반마다 국회서 편성

대표 없이 세금 없는 민주주의를 열려면 당연히 국회가 예산편성권을 가져야 한다. 미국 같은 곳에서는 그런 예산 편성의 주기가 2년 반쯤 된다. 충분히 조사하고 토론하고 조정하고 타협할 수 있는 시간공간이 확보돼 있는 셈이다.

말로만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의장국의 국격을 논할 때가 아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정부, 품격 있는 국가, 전운이 감도는 위기의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한 국민통합의 시대를 열고 싶다면 이제라도 예산편성권을 국회로 이관해야 한다. 예산주기를 2년으로 확장하는 문제도 고려해 볼 만한 일이다. 국회의원이 바뀌고 여야가 바뀌어도 예산국회는 파행을 거듭한다면 국회의원의 도덕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산심의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동의하지 않은 세금을 내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박재창 숙명여대 정치행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