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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차 한 잔]‘이언진 평전-나는 골목길 부처다’ 박희병 교수

입력 | 2010-12-11 03:00:00

“조선에서 자유·평등 꿈꾼 그를 되살리고 싶었다”




“신분차별이 당연시됐던 조선시대에 근대적 사상인 인간의 자유와 평등, 다원적 가치와 인간의 자율성을 논한 선구적 인물이다. 26년의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평생 글쓰기로 사회적 억압과 싸운 치열한 저항가였다.”

박희병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54·사진)는 9일 조선 후기 영조시대 역관 출신 문인 이언진(1740∼1766)을 전근대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인간의 평등을 그처럼 치열하게 주장한 인물도 드물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해 저서 ‘저항과 아만’(돌베개)을 통해 이언진의 대표적인 장편 연작시 ‘호동거실(호동居室)’에 대한 평설을 쓴 데 이어 이번에는 그의 삶과 사상을 담은 ‘이언진 평전-나는 골목길 부처다’(돌베개)를 펴냈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언진에 관한 책을 잇달아 낸 것은 지식인으로서 글쓰기로 사회의 부조리에 끝까지 저항했던 치열함에 끌렸기 때문이다.

이언진은 스무 살 때 한학(중국어)으로 역과(譯科)에 합격한 역관이자 천재적인 문인이었다. 무명이던 그는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1763년 일본에 가면서 지은 ‘바다를 구경하다’(해람편)와 일본사람들에게 지어 준 뛰어난 시로 조선과 일본에서 동시에 이름을 얻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이언진이 요절하자 그의 전기 ‘우상전’을 지었을 정도다.

그의 진가는 많지 않은 글에 남아 있는 그의 사상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한다. 주자학의 교조화로 신분적 차별을 의심하던 사람이 거의 없었던 당시에 평민의 삶에서 도를 찾으며 인간의 평등을 주창했다. 스스로를 부처라고 부를 정도의 강한 자존감으로 누구에게도 굴종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주자학의 완전무결함을 인정하지 않고 유불도(儒佛道) 3교의 회통을 주장하는 다원적 가치를 옹호했다. 그는 스승 이용휴(1708∼1782)를 통해 편견과 선입관을 깨며 사상의 자유를 열어간 중국 명말의 사상가 이탁오(1527∼1602)의 양명학을 받아들였다.

박 교수는 연암이 이언진의 전기를 쓰기는 했지만 그의 진면목을 보지는 못했다고 평가한다. 조선왕조의 틀 안에 있었던 박지원의 인식 틀로는 이미 왕조 밖에 있는 그를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이언진이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사상을 가졌던 것은 중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와 비범하고도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

짧은 생을 산 데다 병으로 죽기 전 자신의 글을 다 태우는 바람에 그는 후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80년대 초 대학원 시절 이언진을 처음 접했을 때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박 교수는 4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그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일본에 남아 있던 일본 사상가들과 나눈 이언진의 필담을 번역해 평전에 넣는 등 그에 관한 자료도 보강했다.

자신의 사상을 담은 많은 글을 태워버린 행위는 소극적인 지식인의 전형이 아니냐는 질문에 박 교수는 “이언진은 자신이 피땀으로 지은 글을 스스로 태웠다. 그것은 더 무서운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불합리한 세계와 죽는 순간까지 불화의 끈을 놓지 않은 지식인이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이언진의 불우한 심정을 따라 살다 보니 자신도 병을 얻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언진의 행적을 통해 조선시대를 인식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의 폭이 넓어졌으면 한다”며 “과거의 인물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만들어 가는 문제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