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자유의지 꺾는 힘은 없어” 수상연설 대신 1심 최후진술서 대리 낭독
텅 빈 의자는 중국 인권의 빈자리를 보여줬다. 그 자리는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중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54) 씨가 앉아 있어야 할 곳이었다. 류 씨의 대형 브로마이드 사진이 부재(不在)의 수상자를 대신했다.
토르비에른 야글란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시상 이유를 밝히는 연설을 한 뒤 금메달과 증서를 그의 빈 의자에 놓았다. 수상자의 강연 대신에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여배우 리브 울만 씨가 류 씨의 ‘나에게는 적이 없다’는 제목의 1심 재판 최후진술서를 천천히 낭독했다. “자유에 대한 인간의 요구를 완전히 없앨 수 있는 힘은 결코 없다. 중국은 결국 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될 것이며 인권이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수상자 없이 진행한 시상식은 110년 역사에서 1936년 11월 나치가 정치범으로 수용소에 억류했던 독일 언론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1935년도 수상자) 이후 처음으로, 74년 만이다. 노벨위원회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개최한 노벨 평화상 시상식장에 류 씨는 물론이고 부인 류샤(劉霞) 씨와 중국 내 반체제 인사들의 참석마저 봉쇄한 중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는 차원에서 시상식장에 빈 의자를 놓았다. 2시간 동안 열린 시상식에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 등 각국 대표와 해외에 거주하는 100여 명의 중국 반체제 인사 등 약 1000명이 참석했다. 중국인 린창 씨가 중국 전통 민요 ‘모리화(茉莉花)’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 74년 만의 수상자 없는 시상식
야글란 위원장은 시상식 연설에서 “류 씨는 단지 자신의 공민권을 행사했을 뿐”이라며 류 씨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풀려나야 한다”고 말했다.
▼ 류 인생역정 소개에 수차례 기립박수 ▼
야글란 위원장이 류 씨 수상의 정당성과 그의 인생 역정을 소개하는 도중 수차례에 걸쳐 참석자들의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그는 전날 기자회견에서 “류 씨에게 주어지는 노벨 평화상이 중국을 변화시킬 것”이라며 “중국이 나라 전체를 봉쇄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중국 법원은 지난해 12월 24일 체제 전복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된 류 씨에게 징역 11년형을 선고했고 그의 부인과 그에게 동조하는 반체제 인사들에게도 가택연금 조치를 내렸다.
중국 정부는 단순히 류 씨나 그 대리인의 시상식 참석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각국에 시상식 불참을 압박했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19개국 대표가 시상식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당초 불참 통보국은 23개국이었으나 막판에 콜롬비아 등 4개국이 참석을 통보했다. 한국에서도 이병헌 주노르웨이 대사가 참석했다.
○ “석방하라” vs “내정간섭 말라”
10여 개의 홍콩 민주단체는 10일 노르웨이 주재 중국대사관 앞에서 류 씨 석방 촉구 시위를 벌였다. 전날에는 미국에서 온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 100여 명이 ‘중국의 자유’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인 뒤 류 씨의 석방을 촉구하는 10만여 명의 탄원서를 공개했다. 이들은 노르웨이 주재 중국대사관에 석방 탄원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반면 ‘노르웨이-중국 협회’ 회원 50명은 시상식이 진행되는 동안 노르웨이 의회 앞에서 “범죄자에게 노벨상을 줬다”며 친중국 집회를 가졌다.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 관계자는 “노르웨이의 중국 교민 일부는 중국 외교관들로부터 반대 시위에 참여하도록 강요받았다”고 주장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0일 “류 씨의 수상은 보편적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중국 정부는 속히 류 씨를 석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바네템 필라이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9일 제네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류 씨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사건에 대한 재심이 이뤄져야 하고 류 씨는 빨리 석방돼야 한다”고 말했다.
○ 중국 정부의 통제 강화
장위(姜瑜)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이 시상된 직후 성명을 내고 “이런 정치극은 중국 고유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인민의 결의와 확신감을 결코 흔들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정부의 검열 강화로 미국 CNN, 영국 BBC 등 외신의 보도가 이틀째 봉쇄됐으며 노벨상위원회 홈페이지 접근도 차단했다. 가택 연금 중인 류샤 씨가 살고 있는 집 주변에는 경찰 경비가 강화됐으며 류샤 씨는 외부와의 연락이 끊겼다. 일부 민주화 운동가들은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외부와의 통신이 끊기거나 일부는 베이징(北京) 밖으로 강제로 쫓겨났다. 중국 당국은 원로 경제학자 마오위스(茅于軾) 씨와 설치미술가 겸 인권운동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 씨의 출국을 막은 데 이어 9일에는 류 씨와 함께 중국 체제의 개혁을 촉구하는 ‘08헌장’ 작성에 참여한 헌법학자 장쭈화(張祖樺) 씨를 억류했다.
그러나 당국의 통제와 인터넷 검열에도 불구하고 일부 누리꾼은 방화벽을 넘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외부와 접촉하고 있다고 AFP통신이 베이징발로 보도했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