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돈키호테’대본★★★☆ 연출★★★☆ 연기★★★☆ 무대★★★★
“지금 이 시대는 꿈과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과 고통 속에 온갖 술수와 거짓, 악덕이 판을 친다”며 상상의 연인 둘시네아(김은실)에게 사랑과 정의를 위해 온몸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하는 돈키호테 역의 이순재 씨.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이는 작가의 의도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세르반테스는 소설의 서문에서 ‘당시 항간에 풍미했던 기사도 이야기의 권위와 인기를 타도하기 위해서’ 돈키호테라는 시대착오적 인물을 창조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돈키호테라는 인물에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응하지 못하고 과거로 퇴행하는 스페인 사회에 대한 조롱과 풍자가 분명 녹아 있다.
하지만 이런 풍자코드만으로 접근하다가는 돈키호테의 진짜 매력을 놓치게 된다. 이 광인은 자못 숭고하다. 현실에서 쓸모없어 보이던 그의 말과 행동은 어느 순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 무모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돈키호테라는 프리즘을 거치는 순간 아름답고 눈물겨운 그 무엇으로 바뀐다.
명동예술극장이 올해 마지막 공연으로 무대화한 연극 ‘돈키호테’(양정웅 각색·연출)는 19세기 프랑스 극작가 빅토리앵 사르두가 원작소설을 극화한 대본을 토대로 했다. 소설의 도입부, 종반부와 함께 방랑기사로 떠도는 돈키호테가 벌이는 여러 에피소드 중 하나를 극적 갈등의 중심사건으로 끌고 왔다. 바람둥이 귀족 돈 페르난도(한윤춘)와 그의 친구 카데니오(김영민) 그리고 두 남자를 각각 사랑하는 도로시아(김양지)와 루신다(김리나)가 얽히고설킨 사랑의 소동을 돈키호테(이순재·한명구)가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전반부의 해학과 후반부의 감동은 돈키호테의 묘미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역설적 미학이 발효되기엔 극적 구성력에서 뭔가 부족하다. 1967년 명동극장에서 초연됐던 데일 와서먼 원작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공연 당시 제목은 ‘동키호테’였다)와 비교했을 때 이는 한층 뚜렷하다. 세르반테스의 실제 삶과 ‘돈키호테’의 소설을 병치한 뮤지컬이 확실히 더 감동적이다. ‘거울의 기사’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돈키호테가 비극적 죽음을 맞으면서 ‘불가능한 꿈’을 열창하는 뮤지컬은 그 대결에서 돈키호테가 승리하며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연극을 극적 구성력에서 확실히 능가한다.
그러나 이런 약점을 연극 ‘돈키호테’는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보상한다. 16세기 황금시대를 누렸던 스페인 제국을 상징하는 갑옷과 투구, 범선이 미니어처처럼 장식된 대형 무대 세트, 흰색과 베이지색으로 무장한 몽환적 의상은 희화화된 돈키호테의 이미지를 고급화한다. 기타와 퍼커션으로 구성된 라이브 음악에 맞춰 스페인풍의 춤과 노래를 곁들인 점도 같은 기능을 한다.
한명구 씨와 함께 돈키호테 역을 맡은 일흔다섯 노배우 이순재 씨의 모습을 통해 돈키호테의 매력을 되씹어보는 것도 이 작품이 가져다주는 묘미다. 현실과 꿈이 뒤섞인 광인과 인생과 무대가 뒤섞인 배우가 미묘한 공명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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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5만 원. 내년 1월 2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