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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게임중독 美명문대 중퇴생, 서울 잠원동 행인 살해 범행 자백”

입력 | 2010-12-18 03:00:00

“칼싸움게임 하다 갑자기 살인충동 들었다”




“게임 속에서처럼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서울 서초구 잠원동 골목길에서 귀가하던 시민을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은 게임 중독에 빠진 미국 명문대 유학생 출신의 ‘묻지마 살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본보 17일자 A14면 경찰, 서울 잠원동 성당 앞 살인 용의자 체포

16일 유력 용의자로 서울서초경찰서에 체포된 박모 씨(23)는 경찰 조사에서 “이달 5일 오전까지 밤새워 ‘칼싸움’ 온라인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밖에 나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살인 충동이 들었다”며 범행을 시인했다. 경찰은 18일 박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 게임 중독이 부른 살인

경찰에 따르면 박 씨는 범행 직전인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플레이스테이션의 폭력적인 격투 게임을 하던 중 5일 오전 6시 30분 흥분 상태에서 부엌에 있던 흉기를 옷소매에 숨기고 집 밖으로 나왔다. 박 씨는 마침 집 앞을 지나가던 노인과 피해자 김모 씨(26)를 발견하고 이들을 따라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지는 김 씨를 범행 대상으로 삼고 아파트 입구 근처까지 쫓아가 흉기로 김 씨의 등을 한 차례 찔렀다. 김 씨를 범행 대상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박 씨는 “그냥”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씨는 피를 흘리며 도망가는 김 씨를 쫓아가 옆구리와 허벅지도 찔렀다. 김 씨는 계속 쫓아오는 박 씨를 피해 범행 현장에서 200m가량 떨어진 잠원동 천주교회 앞까지 도망쳤다. 김 씨는 이날 오전 6시 38분경 잠원동 성당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 성당 관계자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박 씨는 김 씨가 계속 도망가자 추적을 포기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서울 서초구 잠원동 ‘묻지마 살인’ 사건의 용의자 박모 씨가 5일 오전 6시 40분경 피해자 김모 씨를 흉기로 찌른 뒤 현장을 떠나고 있다. 이 장면은 현장 주변 폐쇄회로(CC)TV에 찍혔다. 사진 제공 서울서초경찰서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수사전담팀을 편성해 박 씨의 휴대전화 통화 기록을 분석하고 주변 인물들을 탐문했으나 아무런 원한관계를 발견하지 못했다. 동기가 없는 이른바 ‘묻지마 살인’이라고 판단한 경찰은 범행 장소 인근 폐쇄회로(CC)TV 1777개와 6개 노선버스 CCTV를 정밀 분석했다. 경찰은 이 중 박 씨의 모습이 찍힌 일부 CCTV의 설치 지점을 기준으로 주변 아파트 등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특히 범인이 머리를 삭발하고 특정 브랜드 운동화를 신은 점을 근거로 탐문 수사를 벌였다. 경찰 관계자는 “탐문 과정에서 방문한 한 아파트 신발장에서 CCTV에 찍힌 것과 같은 운동화를 발견했는데, 안에서 삭발 머리의 박 씨가 나타나기에 용의자로 지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경찰이 출석을 요구하자 “증거를 대라”며 거부했고 경찰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16일 오후 집에서 검거했다. 박 씨는 범행에 사용한 흉기를 집에서 깨끗이 닦은 뒤 원래 있던 부엌에 다시 갖다 놓아 가족들은 범행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고교 때 우수생, 미국 유학 적응 못해

경찰 조사 결과 박 씨는 서울 서초구의 한 고교에 다닐 때 전교 10등까지 할 정도로 우등생이었다. 박 씨의 고교 때 교사들은 “평소에도 말이 없고 조용한 학생이었다”며 “나무라면 크게 주눅 들곤 했던 점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고교 졸업 직후 미국 뉴욕 소재 한 주립대 심리학과로 유학을 떠난 박 씨는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씨는 경찰 조사에서 범행을 시인하면서 “공부만 하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 공부를 아무리 해도 F학점만 나오는 등 성적이 안 나와 자퇴를 결심했다”며 “3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고 후회스러운 마음뿐”이라고 진술했다. 올해 7월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한 박 씨는 대인기피 증세를 보이며 집 안에서만 지내며 폭력성 강한 게임을 즐겨 왔다.

피해자 김 씨의 아버지는 아들을 살해한 용의자가 붙잡혔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그는 “외아들이 이유도 없이 죽었다니 더 허탈하고 분노가 치민다”고 말했다. 두 달 전 초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작은 컴퓨터 사업을 시작한 김 씨는 사건 당일에도 집 인근 사무실에서 밤새워 일을 한 뒤 새벽녘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오다 변을 당했다. 경찰 관계자는 “김 씨와 박 씨 집이 70m가량 떨어져 있다”며 “이웃사촌이 묻지마 살인의 범인과 희생양이 됐다”고 말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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