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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강력한 흑-백 조명 ‘흑백 갈등’ 메시지

입력 | 2010-12-21 03:00:00

디즈니 뮤지컬 ‘아이다’
연출★★★★☆ 무대★★★★☆ 연기★★★☆ 가창★★★★




뮤지컬 ‘아이다’는 누비아 흑인노예와 이집트 귀족의 대립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아메리카 제국의 흑백갈등을 암시한다. 이런 갈등은 흑백 조명의 대비에 의해 강조되는데 ‘빛의 뮤지컬’이라고 할 만큼 감탄스럽다. 사진 제공 신시컴퍼니

디즈니는 ‘인어공주’(1989년) 이래 애니메이션 뮤지컬의 성공신화를 쌓아왔다. 어린이들이 좋아할 동화를 바탕으로 하되 성인관객까지 사로잡을 유머와 패러디를 가미하고 아름다운 선율까지 갖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세계 시장을 겨냥해 이야기 무대의 확장을 거듭 시도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여주인공으로 앞세운 ‘포카혼타스’(1995), 아시아 소녀를 앞세운 ‘뮬란’(1998), 중남미 잉카제국 황제를 주인공으로 한 ‘쿠스코? 쿠스코!’(2000) 등이다. 여기에 아랍권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삼은 ‘알라딘’(1992)까지 5대륙을 누빈다.

그런데 잠깐, 뭔가 빠진 느낌이다. 흑인이 주인공인 작품이 없다. 아프리카를 무대로 한 ‘라이언 킹’(1994)과 ‘타잔’(1999)에서도 주인공은 흑인이 아니다. ‘아이다’는 바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디즈니가 오래전부터 준비한 작품이었다.

1871년 발표된 베르디의 동명 오페라는 고대 이집트의 전쟁영웅 라다메스와 전쟁노예가 된 에티오피아의 흑인 공주 아이다의 비극적 사랑을 그렸다. 디즈니는 흑인 여주인공의 애니메이션을 염두에 두고 이 오페라의 어린이용 이야기책 판권을 사들였다. 하지만 디즈니 역사상 애니메이션을 거치지 않은 최초의 뮤지컬로 제작해 2000년 무대에 올린다.

왜 그랬을까. ‘미녀와 야수’(1994)와 ‘라이언 킹’(1997)처럼 애니메이션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제작해 거둔 성과를 토대로, 이젠 아예 처음부터 뮤지컬로 승부를 걸 때가 됐다는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 공식적 설명이었다. 하지만 실제 작품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에 이 작품은 정치적으로 너무 민감하다는 것을.

팀 라이스와 엘튼 존 콤비가 개작한 뮤지컬은 아이다(옥주현)를 에티오피아가 아닌 누비아의 공주로 바꿨다. 누비아는 이집트 남부와 수단 북동부에 걸쳐 실존했던 고대 흑인왕국이자 이집트의 흑인노예 공급 기지였다. 따라서 누비아 흑인노예와 이집트 귀족의 대립구조는 곧바로 아메리카 제국의 흑백갈등과 연결된다.

누비아 노예들이 아이다를 구심점으로 삼아 자신들의 자존감을 재구성하는 장면에 흘러나오는 흑인 가스펠 풍의 노래 ‘신은 누비아를 사랑하시네’도 이를 뒷받침한다. 현대적 의상도 단단히 한몫한다. 라다메스(김우형)의 약혼녀인 이집트 암네리스 공주(정선아)가 펼치는 패션쇼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극의 시작과 끝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이집트전시관이 등장하는 점 역시 이집트제국의 수도 테베와 뉴욕을 등치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강렬한 흑백의 대비를 강조한 조명은 이런 흑백갈등의 요소를 더욱 뚜렷이 살려낸다. 2막 도입부에서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흰 삼각형의 어둠 속에서 암네리스, 라다메스, 아이다가 차례로 등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80대의 무빙라이트를 동원한 ‘아이다’는 특히 ‘빛의 뮤지컬’이라 할 만큼 조명효과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런 조명효과에 발맞춰 카메라 조리개처럼 무대를 좁히고 넓히면서 영화의 클로즈업 효과까지 빚어내는 무대연출도 감탄스럽다.

아쉬운 점은 이런 흑백의 은유가 한국어공연에선 십분 살아나지 못한 점이다. 아이다 역을 맡은 옥주현 씨의 레게머리나, 강렬한 원색배경으로 검은 실루엣으로 처리한 누비아 여자노예들을 통해 그 피부빛깔을 연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성공한 대형뮤지컬에는 보편적 신화가 숨쉬고 있기 마련이다. 라다메스와 아이다의 사랑이야기에서 우리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전설을 발견할 수 있다. 적국의 왕족을 사랑했기에 국가와 사랑 중에 하나를 택해야 했던 남녀가 그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해 죽음으로써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인훈 원작의 ‘둥둥 낙랑 둥’과 비교해 감상할 만하다.

P.S. 디즈니 애니메이션 최초의 흑인 주인공이 등장한 작품 기록은 2009년 발표된 ‘공주와 개구리’에 돌아갔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팬 서비스 차원에서 12월 말까지 협력연출을 맡은 박칼린 씨가 음악감독 몫의 오케스트라 지휘까지 맡는다. 4만∼12만원. 내년 3월 27일까지 경기 성남시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02-577-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