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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한 알의 작은 씨앗이 품은 식물 진화의 거대한 역사

입력 | 2010-12-25 03:00:00

◇씨앗의 자연사 조나단 실버타운 지음·진선미 옮김 256쪽·1만5000원·양문




찰스 다윈은 1877년 펴낸 책 ‘곤충에 의해 수정되는 난의 여러 가지 고안에 관하여’에서 셜록 홈스를 연상시키는 추론을 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보내오는 꽃 중에는 꿀샘의 길이가 무려 11인치(약 28cm)가 넘는 것도 있다. 그런데 꿀은 꿀샘의 맨 아래 1인치 정도에만 들어 있다. 꿀샘은 식물의 수정에 중요하다. 마다가스카르에는 분명히 10∼11인치 길이로 펼쳐지는 긴 주둥이를 가진 나방이 있을 것이다.” 많은 곤충학자들은 그 추론을 비웃었다. 당시는 식물의 ‘섹스’와 진화에 대해 소상히 알려져 있지 않던 때였다.

이후 1903년 마다가스카르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긴 주둥이를 가진 거대한 박각시나방이 보고됐다. ‘크산토판 박각시나방’으로 이름 붙여진 이 나방의 실제 행동은 1990년대에 관찰됐는데 다윈이 추론한 그대로였다.

영국 오픈유니버시티 생태학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3억6000만 년 전 시작된 씨앗 식물의 여정을 생식사(生殖史)를 통해 들여다본다. 식물들의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의 관계, 식물과 곤충이 생식과 생존을 위해 협업과 경쟁을 벌이는 세계, 사람들이 즐기는 커피콩부터 목숨까지 앗아가는 독성을 가진 씨앗이 등장하는 이유까지를 진화 및 유전의 역사에 버무려냈다.

○ 콩들도 하는 ‘섹스’

동물과 달리 식물의 섹스가 알려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1676년이 되어서야 의사이자 식물학자였던 니어마이아 그루가 런던 왕립학회에서 꽃의 해부학에 대해 강연하면서 ‘식물의 정자는 꽃의 수술에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1683년에 출판한 ‘식물해부학’에서는 ‘태아에 해당하는 씨앗’이라는 표현을 썼다.

오늘날 수많은 종들의 이름을 붙인 학자로 유명한 칼 폰 린네는 식물의 성을 분류하는 데도 공적을 남겼다. 1730년 린네는 지도교수에게 “동물과 식물들이 가족을 늘리는 방법이 매우 유사함을 발견했다”는 내용의 에세이를 신년인사로 보냈고, 1735년에는 꽃의 섹스 기관들 사이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원칙으로 삼은 ‘자연의 체계’를 출간했다.

예수가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라고 말했듯이 식물의 씨앗은 먼지처럼 작은 것부터 무게 20kg에 이르는 ‘괴물 씨앗’까지 크기와 모양, 성분도 다양하다. 인류가 식용으로 활용해온 씨앗인 도토리, 석류, 커피콩. 사진 제공 양문 · 동아일보 자료 사진

18세기 중엽 ‘식물의 성’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는 했지만 배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난자와 정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빚어졌다.

실제로 오늘날의 식물에는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이 함께 관찰된다. 서양민들레, 블랙베리, 산사나무, 마가목 등 여러 식물이 무성생식으로 씨앗을 만든다. 딸기는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이 모두 가능하다. 완두콩 교배 실험을 성공적으로 끝낸 멘델은 이후 수년 동안 조팝나물 교배실험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조팝나물이 무수정식물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식물계에서 유성생식이 보편적인 이유는 학자들의 호기심을 늘 자극했다. 유성생식이 선호되는 유력한 이유는 ‘유익한 유전자들이 서로 합쳐져 후대에 전해지는 이점’ 때문이다. 무성생식은 똑같은 파일이 복사되는 것처럼 똑같은 유전자가 후대에 전해지기에 환경 적응에 불리하다. 무성생식 군락은 질병에도 취약하다.

○ 생존을 위한 식물과 동물의 협업과 경쟁


다윈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주둥이가 긴 나방을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은 식물의 생식과 진화에 대한 지식 덕택이었다. 식물과 곤충의 협업관계는 벌이나 나비가 꽃가루를 옮겨주는 정도를 넘어선다. 북아메리카에서 자라는 유카나무는 유카나방과 의존관계를 이룬다. 암컷 나방이 꽃가루받이를 도와주면 유카나무는 씨앗의 일부를 나방 유충의 식량으로 제공한다. 무화과나무는 자신들의 수정을 도와주는 말벌종을 위해 수정과는 상관이 없는 ‘중성과육’을 만들어 말벌에게 제공한다. 말벌들은 이 중성과육에만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른다. 마치 무화과가 말벌에게 ‘꽃가루받이 매개 서비스’ 비용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치열한 경쟁도 엿볼 수 있다. 붉은솔잣새와 로지폴소나무는 경쟁을 통해 각각 진화 형태가 결정됐다. 로지폴소나무는 씨앗을 보존하기 위해 솔방울의 내면을 송진으로 채우고 단단한 ‘갑옷’ 무장도 한다. 솔잣새는 윗부리와 아랫부리를 교차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솔방울의 비늘을 젖히고 씨앗을 꺼내 먹는다. 로지폴소나무는 솔잣새가 있는 지역에서는 솔방울의 모양을 더 길고 좁게, 비늘도 더 두껍게 만들어 솔잣새가 쉽게 까먹을 수 없도록 만든다.

유카나무에는 속임수 나방이 기생한다. 유카나방과의 거래를 알기라도 하듯 이미 꽃가루받이가 끝난 열매에 몰래 알을 낳는 것이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씨앗부터 20kg이 넘는 씨앗까지

난초의 씨앗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부터 무게가 20kg이나 되는 코코 드 메르(바다의 코코넛)까지 씨앗의 모양과 크기는 다양하다. 인간은 씨앗에서 식량뿐 아니라 연료용 기름과 향수, 약품까지 얻는다.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씨앗이라면 단연 커피콩일 것이다. 유전과 진화라는 심각한 주제로 시작한 책은 씨앗을 활용한 요리와 음료 이야기로 이어진다. 씨앗이 항상 인간에게 이롭지만은 않았다. 591년부터 1789년까지 유럽에서는 최소한 132차례의 맥각병이 발생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맥각병은 식물의 질병으로 포자가 바람에 날려 전염됐다. 씨앗 속에서 곰팡이 균사덩어리로 자란 맥각균은 호밀빵 속에 들어가 사람을 죽였다.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으로서도 씨앗은 인류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로 ‘제너럴셔먼’이라고 불리는 나무, 자이언트 세쿼이아는 보잉747 점보 제트여객기 여섯 대를 합친 만큼이나 거대하다. 그러나 이 나무도 6000분의 1g에 불과한 씨앗에서 시작했다. 노자는 기원전 6세기에 이런 말을 남겼다. “씨앗 속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이, 그가 바로 천재일 것이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