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 디트로이트에서 기타리스트 프레드 소닉 스미스와 함께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예술계를 떠나 있던 이 뉴욕 펑크의 대모를 난 잘 몰랐다. 그녀의 공연을 본 적도 없다. 그녀가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TV 범죄드라마 ‘로 앤드 오더’에 동시에 열광하고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탐정소설을 쓰는 뒤죽박죽의 취향을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솔 메이트(soul mate)로 저명한 인물 사진작가가 된 로버트 메이플소프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래서 지난달 전미 도서상을 수상한 패티의 회고록을 보고 놀랐고 거부할 수 없는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에 빠져들었다. ‘완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벽히 맞지 않는 퍼즐’과 같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실상 우리 모두가 그렇다-그녀의 책 ‘그저 아이일 뿐(Just Kids)’은 아프도록 아름다웠다. 그건 두 배고픈 예술가가 첼시호텔에서 펼치는 ‘라보엠’이었다.
로버트가 동성애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남자는 자신을 구해줄 여자가 없을 때 동성애자가 된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썼다.
무일푼의 패티는 처음 뉴욕에 갔을 때 센트럴파크나 묘지에서 잠을 잤다. 그녀는 로버트를 만나 때로 상점에서 먹을 것을 훔쳤다. 둘은 미술관에 가기에는 너무 가난했다. 핫도그도 나눠먹었다. 주저하는 로버트에게 사진을 찍어보라고 권한 것은 그녀였다.
패티는 화산처럼 폭발하던 1960, 70년대 뉴욕 시내의 보헤미아의 세계를 생생하게 회상했다. 그녀는 첼시호텔로 여러분을 안내한다. 그곳은 시인 딜런 토머스부터 가수 밥 딜런까지 예술가의 피난처였다. 영화감독 샘 셰퍼드, 화가 살바도르 달리, 작가 윌리엄 버로, 가수 재니스 조플린, 시인 앨런 긴즈버그, 화가 앤디 워홀, 그녀의 우상이었던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그곳에 거처했다.
상업적이고 사회지향적인 로버트는 워홀에 접근하려 했다. 그러나 패티는 “나는 시대를 비추는 예술가가 아니라 시대를 바꾸는 예술가를 더 좋아한다”고 충고했다.
42세로 그가 숨진 1989년 3월의 어느 아침, 그녀는 켜 놓은 채 잠든 TV의 예술채널에서 오페라를 들으면서 깼다. 화가 카바라도시를 향한 토스카의 노래였다. ‘사랑에 살고, 예술에 살고.’ 그건 로버트에게 보내는 패티의 작별인사였다.
모린 다우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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