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영화인들이 뽑은 ‘2010 뜻밖의 흥행실패 영화 6’
갈수록 헤아릴 길 없는 관객의 속내. 영화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또 한 해 예측불허 웃음과 울음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장진 감독의 ‘퀴즈왕’을 기획한 강우석 감독은 “돈 없어서 제작 못하는 게 다행이다 싶을 만큼 요즘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고 했다.
새해 첫 박스오피스 오픈을 기다리고 있는 제작 수입 배급 연출 분야 베테랑 영화인들에게 ‘2010년의 가장 놀라운 실패작’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강 감독, 조철현 타이거픽쳐스 대표, 심재명 명필름 대표, 유정훈 쇼박스 대표, 조성규 스폰지이엔티 대표,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 채희승 미로비젼 대표가 “재미있고, 감동 깊고, 시사 반응과 언론 평도 좋아서 기대했는데 흥행은 죽을 쑨 비운의 개봉작”에 대한 질문에 답했다.
○ 감동이 깊어도 세련미가 없으면…
‘맨발의 꿈.’ 이 영화는 한국의 사상 첫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로 축구 열기가 고조됐던 6월 24일 개봉했다. 영락한 전직 축구선수가 동티모르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며 인생의 마지막 승부를 거는 드라마.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적인 내용에 시사회를 찾은 많은 어린이 관객이 눈물을 흘렸다. 미국 뉴욕 유엔본부 시사와 언론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최종 관객 수는 33만9000여 명에 그쳤다. 배우와 감독 지명도가 떨어진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메이저 배급사인 쇼박스가 투자에 참여해 전국 341개 상영관에서 개봉한 영화의 성적치고는 초라했다.
강혜정 대표는 “함께 본 열세 살 큰딸이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힘들게 노력해 꿈을 이루는 이야기가 뭉클했다’고 하더라. 개봉 날 끝나고 박수 치는 관객도 있었다. 주변에 자주 권했지만 한 달도 안돼 상영관 찾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유정훈 대표는 개봉시기와 마케팅 포인트 선택을 패인으로 꼽았다.
“축구 관련 볼거리가 충분한 상황에서 촌스러운 동티모르 어린이 축구가 눈에 들어왔겠나. 유엔과 외교통상부의 관심은 솔직히 악재였다. 뜻하지 않게 공익 이슈가 되면서 ‘착하고 뻔한 영화’로 각인돼 버린 거다.”
○ 현실도 우울한데 극장에서까지는…
‘시’는 촘촘한 이야기와 유려한 연기를 통해 세상에서 잊혀져가는 주제를 큰 울림으로 전달했다는 호평을 받으며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칸 영화제 기간인 5월 13일 171개 스크린에서 개봉한 이 영화의 최종 스코어는 22만400여 명에 불과했다.
영화의 실체와 상관없이 ‘어려운 내용이겠다’는 인상이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의견이 나왔다. 심재명 대표는 “예술적인 추구에 난해하게 몰두한 영화가 아닌데 젊은 관객이 잘 모르는 주연배우와 문학적인 제목이 ‘화려하지 않고 지루하겠다’는 인상을 준 것 같다”고 했다.
“일단 첫인상에서 분위기가 어둡거나 무겁게 느껴지면 회피대상이 된다. 현실을 살아내는 게 힘겨워서인지 극장에서는 다 잊고 웃고만 싶어 한다. ‘좋은 영화 입소문의 뒷심’이라는 것도 이제 옛일이 됐나 보다.”(강우석 감독)
○ 조금이라도 복잡하고 낯설면 외면당해
조철현 대표는 한석규 김혜수 콤비가 ‘닥터 봉’ 이후 15년 만에 재회한 코미디 ‘이층의 악당’을 꼽았다. 원숙한 연기 콤비네이션, 맛깔스러운 유머, 깔끔한 구성 등 만듦새가 빼어났지만 관객 수는 60만5000여 명에 그쳤다.
“이제는 영화도 아이폰 디자인처럼 단순해야 먹히나 싶다. ‘이층의 악당’은 코미디와 미스터리를 혼합한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다. 그냥 로맨스면 로맨스, 스릴러면 스릴러여야 하는 건지. 설정이 아무리 신선하고 재미있어도 한마디로 명료하게 떨어지지 않으면 환영받지 못한다. 단순한 청년재벌 성공신화 이야기에서 벗어난 ‘소셜 네트워크’(51만4000여 명)도 같은 사례다.”
심재명 대표도 ‘소셜 네트워크’에 대해 “소재는 ‘핫’한 데 비해 이야기가 복잡한 데다 배우들의 매력도 떨어졌다”며 “훨씬 더 진지하고 복잡하지만 섹시한 스타일로 개봉 외화 최고 성적(587만 명)을 거둔 ‘인셉션’과는 대조적”이라고 했다. 성(性)도착을 소재로 한 ‘페스티발’(19만9400여 명)도 “조금만 낯설거나 터부로 여겨지는 이야기는 역시 무참하게 깨진다는 절망감을 확인해 준”(채희승 대표) 영화로 꼽혔다. 지난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밀크’(1만3200여 명)를 수입한 조성규 대표는 “개봉이 외국에 비해 조금만 늦으면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를 찾는 건 블록버스터나 작은 예술영화나 마찬가지”라며 “영화를 관람하기보다는 패션 상품처럼 수집하는 경향이 대세인 것 같아 회의가 든다”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동영상=영화 `이층의 악당` 김혜수 독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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