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성씨 모두 버리고 이름만 쓰자”
최근 대학 캠퍼스에는 ‘성(姓)’을 쓰지 않는 학생이 부쩍 늘고 있다. 이달 초 1년간 공석이던 서울대 제53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지윤 씨(21·여)도 성을 쓰지 않는다. 선거운동 기간 서울대 관악캠퍼스 곳곳에 붙은 대자보에도 성을 뺀 채 총학생회장과 부회장의 이름 ‘지윤·두헌’만 올렸다. “성씨 자체가 가부장제의 산물입니다. 여성운동에 관심이 많은 만큼 개인적인 자리에서건 공적인 자리에서건 성을 빼고 이름만 쓰고 있습니다.” 지윤 씨의 성은 이(李)씨지만 학생회장 신분으로 발언할 때는 이름으로만 자신을 소개한다. 부총학생회장인 두헌 씨(23)는 평소 남녀평등을 강조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입학 후 페미니즘 관련 세미나에 참석한 뒤 성을 빼기로 결심했다.
연세대 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인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 씨도 이름만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현 씨는 “주민등록증에 성이 붙어 있는 이름을 보면 나 자신이 아니라는 괴리감이 든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혜경 교수는 ‘(이박)혜경’이라고 부모 양성에 괄호를 붙여 쓴다. 성을 붙여 쓸 때는 어머니 성인 박 씨를 쓰는데, 혈통주의에 반대하고 모계를 확인하자는 의미에서다. (이박)혜경 교수는 “꼭 성을 붙여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괄호를 쓰는 것”이라며 “제도적 힘이 강한 곳에서는 이름만으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아 예술창작 활동을 하는 이들이 주로 그렇게 쓰고 있다”고 말했다.
부모 양쪽 성을 모두 썼던 여성운동가 중에는 부모 성을 빼고 이름으로만 활동하거나 부모 한쪽 성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회귀하는 사례도 있다. 서울시의회 김명신 의원(54)은 2008년 호주제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김정명신’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아버지 성에 어머니 성까지 붙여 쓴 것. 김 의원은 “호주제 폐지 운동의 일환으로 양쪽 성을 함께 썼다”며 “호주제가 폐지돼 목적을 달성한 데다 양쪽 성을 모두 쓰는 게 상대방에게 불편을 주기도 해 이제는 한쪽 성만 쓰고 있다”고 말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자녀를 낳으면 성이 4개가 되느냐는 지적부터 어머니의 성도 결국 부계 성을 따른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여성학과 허라금 교수는 학교에서 수업을 하며 성을 쓰지 않는 학생들을 자주 접한다. 허 교수는 “그동안 부계 혈통의 가족제도에 대한 반발로 부모 양쪽 성을 쓰는 경우가 있었는데 성을 쓰는 것 자체가 혈통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며 “유교문화권인 한국사회에서 혈통에 의한 정체성을 강요하다 보니 일종의 문화운동으로 아예 성을 쓰지 않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유교계는 이런 움직임에 발끈했다. 최근덕 성균관장은 “원칙적으로 아버지 성을 따라야 한다”며 “때에 따라 어머니 성을 따를 수도 있지만 성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