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날마다 페이지가 고정된 채 펼쳐져 있었지만 소년은 하루도 지나치는 날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책은 다음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다음 날은 또 그 다음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소년은 영문도 모른 채 계속 책을 읽어 나갔다. 매일 찾아와 책을 읽고 가는 소년을 보고 책방 주인이 늘 다음 페이지로 넘겨 놓곤 했던 것이다.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나는 그 후 소년이 어떻게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다. 아마 소년은 책을 읽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책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책을 읽음으로써 스스로의 삶에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싶어 했던 소년의 열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년을 위해 매일 책장을 넘겨준 책방 주인의 선한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책방 주인이 계속 책장을 넘겨주지 않았다면 소년은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해서 읽는 일에 곧 싫증을 내었을지 모른다. 소년이 책을 통해 가난한 삶에 희망의 씨앗을 심으려고 하는 순간, 책방 주인은 씨앗을 깊게 심게 하고 물과 햇빛을 제공해 주었다.
우리 주변에도 책방 주인처럼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많다. 내가 아는 분 중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백경학 씨도 바로 그런 분이다. 백경학 씨는 스코틀랜드에서 부인이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는 일을 겪은 뒤 한국에 돌아와 재활전문병원 건립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이를 위해 벌써 5년째 동분서주하고 있다.
나는 백경학 씨가 장애아 10여 명을 데리고 백두산 천지를 찾아가는 일에 동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왜 굳이 저 아이들을 데리고 힘들게 백두산을 오르려는지 생각한 적이 있다. 아이들의 삶에 희망을 만들어 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백두산을 오르면서 백경학 씨는 아이들에게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린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게 중요해. 그게 우리가 백두산을 찾은 까닭이야. 많은 사람들이 혼자 먼저 올라가려고 하니까 다들 살기가 힘든 거야.”
아이들은 천지로 올라가는 1200여 개나 되는 계단을 누구 하나 먼저 올라가지 않았다. 혹시 누가 뒤처지지는 않는지 잠시 쉬면서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곤 했다. 그리고 다 함께 맑고 푸른 가슴을 드러낸 백두산 천지를 보고 환하게 웃으면서 만세를 불렀다.
백두산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천지가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에 천지가 없다면 백두산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는 한층 더 상실된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것도 결국 우리 마음속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며 아이들에게 내가 쓴 시 ‘백두산’을 낭독해 준 뒤, 동화작가 정채봉 씨가 천지를 보고 쓴 시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를 떠올렸다. ‘아!/이렇게 웅장한 산도/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래서일까. 그날 백두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내내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는 희망의 백두산을 하나씩 선물 받은 거야. 이제 그 백두산을 어떻게 소중히 간직하느냐 하는 건 각자 우리 자신한테 달렸어. 나는 슬프고 힘들 때마다 내 가슴속에 있는 백두산을 생각할 거야. 그리고 백두산한테 말할 거야. 그래, 너처럼 웅대한 산도 슬퍼서 눈물샘이 있는데, 나같이 연약한 인간에게 눈물샘이 있는 건 당연한 거야. 나도 슬플 때마다 항상 널 생각하고 힘낼게.”
오늘에 대한 감사함에 미래 열려
60대가 된 지금이라도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을 원망하기보다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감사는 희망의 기초다. 감사하지 못하면 분노가 생기고 미래를 바라볼 수 없다. 미래를 바라본다 하더라도 하나의 미래밖에 보지 못한다. 미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삶에다 나의 삶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책방 앞을 떠나지 않았던 소년처럼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해야만 책방 주인이 나타나 또 다른 희망으로 나를 인도할 것이다.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