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김보현)는 등잔불 밑에서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고 멍석을 틀었다. 할머니(이보익)도 밤마다 물레질을 했다. 어머니(강반석)는 낮에는 밭에서 종일 김을 매고 밤에는 무명낳이를 하셨다. 집에 벽시계도 없었다. 숭실중학교에 다니는 남편(김형직) 등교시간에 맞추어 아침밥을 짓느라 어머니는 뒷집에 가서 주인을 깨우기 미안해 울타리 밖에 쪼그리고 앉았다 시계종이 땡땡 치는 소리를 듣고 시간을 알아오셨다.’
김일성은 자신의 독립투쟁 행적과 아들 김정일의 출생지 등에 관해 과장과 날조를 예사로 했지만 회고록의 이 대목은 사실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백성이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 김일성 일가는 만주로 이사 가서도 윤택한 삶을 꾸리지 못했다.
김일성은 그래도 어려서부터 인민의 굶주림과 헐벗음을 보고 겪으며 자라 민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농촌 시찰을 나가면 모를 심고 벼를 벴다. 농가의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도 열어보았다. 다른 말은 몰라도 김일성이 “모든 인민(人民)에게 쇠고깃국에 이밥(쌀밥)을 먹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는 유훈은 진심이라고 믿고 싶다.
아버지와 달리 김정일은 어린 시절부터 황태자였다. 누구든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에는 공감 뉴런(신경세포)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자유북한방송 대표 김성민 씨는 “북한의 방송과 신문에 나오는 것이 온통 김정일 사진인데 곤궁한 삶의 현장을 시찰하는 장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정일이 군부대 돌아다니듯이 농촌을 시찰했다면 아마 북의 식량난이 풀렸을지도 모른다.
김 대표가 황해북도 신계군 주체포 군단에서 근무할 때 김정일이 방문했다. 군의 보급사정이 형편없어 몇 년씩 쓴 몽당 칫솔에 치약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김정일이 오기 몇 시간 전에 후방부(보급부대)가 들이닥쳐 사병들이 쓰는 칫솔 치약을 잽싸게 새것으로 바꿔 놓았다. 김정일은 새 치약과 칫솔을 보고 기분이 좋았던지 “후방부에서 일을 잘하고 있군”이라고 칭찬했다. 그는 “김정일이 인민이 어렵다고 어렴풋이 짐작은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를 것이다. 김정일에게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느라 간부들이 통계를 조작하고 사실대로 보고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나는 대외사업과 군을 담당할 테니 경제는 간부들이 맡아서 하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인민이 끼니를 거르든 나무껍질을 벗겨 먹든 김정일의 관심은 온통 세습왕조 체제의 유지에 쏠려 있다. 북의 관리들을 다수 만난 자선단체 대표는 “1994년 김일성이 죽고 나서 고난의 행군이 찾아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철옹성에 싸인 그들만의 천국
김정은도 아버지처럼 인민의 고통을 모르고 자란 황태자다. 북한은 김정은이 어머니 고영희(2004년 유방암으로 사망)와 함께 살던 주택을 새로운 후계자의 역할에 맞게 재건축하고 있다. 선명하게 찍힌 인공위성 사진으로 확인한 것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강원도 송도원에 짓는 김정일 일가의 별장은 100m 깊이의 바닷속을 관찰할 수 있는 관망대를 갖추었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부각한 이후 2000억 원에 가까운 돈을 들여 새로 짓는 주택과 별장은 인민의 삶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천국이다.
3대 세습체제가 무너져야만 북한은 변화할 수 있다. 2011년은 북한 주민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는 해가 되기를.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동영상=김일성 사진 들고 광화문 활보하는 옛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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