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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세상 모든 이야기는 하나다

입력 | 2011-01-04 03:00:00

연극 ‘미친극’
대본★★★★ 연출★★★☆ 연기★★★☆ 무대★★★☆




여러 개의 이야기를 엮어서 독특한 이야기를 빚어낸 연극 ‘미친극’의 극중극 장면. 한 명의 아내를 두고 사랑의 줄다리기를 펼치는 사채업자 방학수(김학수·왼쪽)와 극작가 지망생 도연(김승철)이 도끼가 박힌 ‘감나무 또는 배나무’ 둥치에 기댄 채 수컷의 동병상련을 나누고 있다.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득의만만했던 방학수를 기겁하게 하는 뜻밖의 반전으로 이어진다. 사진 제공 극단 백수광부

첫 장면은 이상의 소설 ‘날개’를 닮았다. 밤마다 화장을 하는 아내 장미(김민선)는 술집에 나가 돈을 벌어오고 그에게 빌붙어 무위도식하는 남편 도연(김승철)은 아내를 기다리는 무료함을 글로 달랜다. 상황뿐 아니라 “왜 그런 눈으로 보시야요”식의 그들의 코믹한 말투도 1930년대 구투의 문어체를 빼닮았다.

두 번째 장면은 코언 형제의 영화 ‘바톤 핑크’를 닮았다. 장미와 도연의 이야기는 한 연극 연출가(장성익)가 쓰고 있는 대본 내용임이 밝혀진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고민하는 그에게 사채업자 방학수(김학수)가 나타난다.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던 방학수는 연출가가 쓰고 있는 대본에 자신을 등장시킬 것과 그 제목을 ‘착한 남자 방학수’로 할 것을 요구한다. 연출가는 돈과 폭력에 굴복해 이를 받아들인다.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극작가가 할리우드 영화 시나리오를 위탁받은 뒤 황금과 폭력에 감염돼 현실감각을 상실한다는 내용의 ‘바톤 핑크’와 유사하다. 단, 연극의 주인공은 바톤 핑크(존 터투로)에 해당하는 연출가가 아니라 보험판매원을 가장한 연쇄살인마 찰리(존 굿맨)에 해당하는 방학수다.

세 번째 장면에선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가 떠올랐다. 다시 도연과 장미가 등장하는 극중극 상황. 집에 혼자 있던 도연이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수화기를 들자 방학수가 그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온다. ‘매트릭스’에서 네오(키아누 리브스)가 가상현실과 현실을 넘나들 때 전화선을 이용하는 것을 빼닮았다.

방학수는 장미가 꾼 돈을 못 갚으면 자신의 아내가 되기로 했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내밀며 아내 하나, 남편 둘의 기묘한 동거를 요구한다. 방학수가 도연을 형님이라고 깍듯이 부르면서도 장미를 포기하지 않는 이 장면들은 박현욱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연상시킨다.

극단 백수광부의 창단 15주년 기념작인 ‘미친극’(최치언 작·이성열 연출)은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의 혼종모방을 통해 “모든 이야기는 하나로 귀결되며 그 하나의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잠언을 절묘하게 극화한다. 절묘하다고 표현한 것은 알게 모르게 익숙한 이야기들을 끌어오면서도 그 대부분을 뒤집어 버리기 때문이다.

극의 창작 과정을 다룬 이런 작품에서 희생되는 인물은 대부분 작가이다. 작가에게 온갖 압력을 행사하는 방학수와 같은 인물은 각각 세계의 창조주인 작가를 갖고 노는 악마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미친극’에선 이런 역학관계가 기막히게 뒤집힌다.

방학수는 극과 현실을 오가며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려 한다. 현실에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 투철한 속물이면서 극 중에선 순정을 간직한 착한 남자가 되려 한다. 그는 이를 위해 현실에선 연출가를 위협하고 극에선 극작가 지망생인 도연을 어르고 달랜다.

하지만 연출가가 쓴 연극 내용이 방학수의 현실이 되고, 극 중 인물인 도연이 쓴 희곡의 내용도 방학수의 현실이 된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방학수를 옥죄어 온다. 그 순간 방학수는 깨닫는다. 자신이 이야기의 덫에 걸린 사냥감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갖고 논다고 생각했던 연출가와 도연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점을.

방학수는 이런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바톤 핑크’의 찰리처럼 일대 살육극을 펼친다. 하지만 그에게 걸린 이야기의 저주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이야기 밖으로 달아났다고 생각했던 방학수는 다시 자신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와 있음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브라보!

종반부 방학수에게 살해된 도연이 목만 남은 상태로 등장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야말로 살해된 여인의 목이 들었을지 모를 상자가 주요 오브제로 등장하는 ‘바톤 핑크’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지난해 12월 31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한 이 연극은 8∼30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로 무대를 옮겨 공연을 이어간다. 2만∼3만 원. 02-814-1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