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의 낙담 … 99%의 기대
○ 3월 00일 놀람… 학비지원 신청, 우리반 28명 중 26명이 감면 대상
학비와 급식비 지원 신청은 새 학기에 가장 중요한 업무가 됐다. 주민등록등본, 건강보험료 영수증, 기초생활수급자 증명서…. 신청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챙기다 보니 아이들의 형편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와 한부모 가정 혜택 등으로 학비가 감면되는 경우를 포함해 우리 반 28명 중에서 두 명을 제외하고 지원서를 제출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애가 거의 없다. 하는 일 없이 집에 있거나, 일용직을 전전해 분명한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은 집이 어렵다고, 장학금을 달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아이들은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휴대전화와 비싼 점퍼를 산다. 어떻게든 남들과 비슷해지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궁금했다.
우리 반 정현(가명)이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이번이 세 번째.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병문안을 갔었다. 그런데 2주 후, 찬호(가명)와 정훈(가명)이가 또 사고를 당했다. 찬호는 배달하다가 종아리와 발목을 다쳤다. 퇴원 후에도 오토바이를 탈 거냐고 물으니, 대답을 안 한다.
○ 10월 00일 충격… 학력평가 모습, 잠 자거나… 한 번호로 찍거나…
이 학교에 온 뒤 여러 번 놀랐지만 학력평가 때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대부분 한 번호로 찍거나 지그재그로 답안지를 표기했다. 잠자거나 음악을 듣고 만화책도 봤다. 문제는 그런 행동을 제지하기 쉽지 않다는 것. 배운 적도 없는 문제를 맞히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묻고 싶어졌다. 언제까지 아이들의 형편없는 점수를 봐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아이들이 자괴감과 무력감을 견뎌내는 걸 지켜봐야 할까. 평가를 받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그저 이 학생들이 치를 수 있는 시험을 만들어 달라는 것. 아이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싶다.
○ 11월 00일 도전… 대입면접 준비, “How old are you?”에 대답 못해
노동부 산하의 폴리텍대는 학비 부담이 적고 자격증을 많이 딸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전문대와 달리 면접시험을 봐서 방과 후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일단 예시부터 보여줬다. 그 소개서는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1남 1녀 중 장남입니다’로 시작했다. 우리 반 인성(가명) 영규(가명) 형도(가명)는 모두 어머니가 안 계신 한부모 가정이었다. 그래서일까. 영규는 ‘평범한 가정에서’로 시작하는 자기소개를 하지 않으려 했다.
동석(가명)이가 성남폴리텍대 면접을 보고 왔다. 자기소개는 잘했는데, 중간에 영어 질문이 있었다고 한다. 한 면접관이 “How old are you(몇살 입니까)?”라고 묻자 당황해서 답을 못했다는 말이다. 면접관에 따라 영어나 수학을 묻기도 한다는데…. 면접을 앞둔 친구들은 걱정부터 했다.
졸업 고사가 끝난 이후 지금 우리 반의 근황은 이렇다. 우리 반에서 가장 우수한 오준이는 전문대학에 수시 합격했고 폴리텍에 다닐 예정인 영규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있다. 종민이는 기술 부사관 시험을 보려 했는데 군대에 다녀온 뒤 일할 거라 한다. 7명이 대학에 들어갔고 13명이 취업했다. 열악한 공장에서 월 90만 원을 받지만 열심히 모아서 대학에 가겠다는 아이도 있고 군대 갔다 와서 돈을 벌겠다는 친구도 있다. 기특하다.
2학기 동안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학교 밖의 세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았다. 취업을 나간 아이도, 나가지 못하거나 나가지 않은 아이도 염려되고 불안하다. 일이 힘들지 않은지,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그래도 제 나름으로 길을 열어 가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 감사하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 선취업… 후진학… SPC 제과제빵 산학협력
■ 이런 대안
서울 강남구 수서동 SPC그룹 제과제빵스쿨의 제과제빵 실습 현장. SPC그룹은 전문계고(실업계고) 학생들에게 제과제빵 실습 교육을 하고 나아가 취업의 문도 열어 놓고 있다. 사진 제공SPC그룹
○ 돈도 벌고 진학 꿈도 꾸고
우선 취업 쪽으로 진로를 잡았지만 그렇다고 안 양이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안 양은 SPC그룹이 정부의 정식 인가승인을 받아 3월 개교할 예정인 사내대학 ‘SPC식품과학대학’에 진학할 꿈에 부풀어 있다. 입사 후 6개월이 지나면 이곳에 입학해 전문학사(베이커리학) 학위도 딸 수 있다. 안 양은 “대입을 준비하면서도 대학 졸업 후 취직이 어려워 불안해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적지 않은데, 나는 취직해 돈도 벌면서 공부도 이어갈 수 있어서 교육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전문계고(실업계고) 학생들의 성공적인 사회 진입을 도우려면 직업교육의 내실화는 필수다. 고교 졸업장과 학교에서 딴 자격증만으로는 안정된 일자리를 얻거나 사회적 인정을 받기 힘든 상황에서 무력감에 빠져 학업에 소홀해지거나, 목표도 없이 일단 ‘어디든 대학에 붙고 보자’는 학생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SPC의 사례처럼 기업이 나서 교육과 취업기회를 제공하고 사내대학 등을 통해 고등교육 기회를 주는 ‘선(先)취업, 후(後)진학’ 모델이 특성화고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대안이 될 수 있다. 2005년부터 삼성중공업은 조선산업 마이스터고교로 선정된 경남 거제시 거제공고 학생들을 매년 10∼15명씩 취업시키고 있다. 2007년부터 사내대학인 삼성중공업 공과대학을 개설해 전문학사를 딸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 취업 중심 학교에 지원 늘리자
현재 전국엔 진학보다는 우수한 직업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는 마이스터고교가 24곳 있다. 이들 학교에 대한 정부와 자치단체, 산업계의 지원 확대도 필요하다. 교육과학기술부 관계자는 “현재 마이스터고 전체 정원(3600여 명)의 50% 수준인 기업체의 채용약정 인원을 2015년까지 80% 선으로 높여 안정적이고 질 좋은 일자리를 더 많이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직업 교육의 내실화와 함께 전문계고 소속 학생들의 정서 교육과 자존감, 성취감 향상을 위해서 재학 중에 음악, 미술활동을 장려하고 각종 전시회나 연주회 등을 체험할 기회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학비 면제, 기숙사, 장학금 제공 등 교육비 부담이 적은 마이스터고교에 사회적 배려 대상 학생이 더 많이 들어갈 수 있게 입학 문호도 넓혀 나가야 한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