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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의 사람 이야기]계약기간 4년 남기고 경질 ‘선동열‘ 전 프로야구 삼성 감독

입력 | 2011-01-10 03:00:00

“야구는 부모와 같아… 지도자 생활 하면서도 끝없이 배워”




인터뷰에 어렵게 응하긴 했지만 그의 말은 담백하고 꾸밈없었다. 표정이나 목소리도 밝았다. 서운함을 감추거나 애써 억누르려 하지도 않았다. 평소 위기상황에서 남 탓을 하기보다는 ‘이번 일을 통해 뭘 배울 수 있을까’를 고민해 왔다는 ‘야구영웅’의 내공이 느껴졌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프로야구 삼성 선동열 전 감독(48)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까운 지인을 통해 ‘민감한 질문’은 안 하기로 하고 야구 인생을 듣는다는 조건으로 만났다. 인터뷰 장소는 7일 오후 5시, 친구들과의 신년모임이 예약된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였다. 그는 대구에서 막 짐을 싸들고 올라오는 길이라고 했다. 구단 운영위원이지만 전지훈련에서도 빠질 거라고 했다. 하지만 표정이나 목소리가 많이 어둡지는 않아 보였다.

―서운하지 않나.

“원래 승부의 세계가 다 그런 거 아닌가. 야구만 그런 게 아니라 사회생활이라는 게 원래 냉정한 거 아닌가.”

―(경질을) 예상은 하고 있었나.

“계약 기간이 4년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당혹스러운 점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작년에 김응용 사장님, 김재하 단장님 다 나가시는데 혼자만 남는 게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었다. 다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류중일 감독도 내가 추천했다. 충분히 잘해 나갈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구단 운영위원이긴 하지만 뭐, 현장에서 떠나는 거나 마찬가지고….”

그는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2004년 코치(1년)를 시작으로 감독 6년 합쳐 삼성 라이온스 유니폼 입은 지 7년이 됐다. 그동안 한국시리즈 우승 2번, 준우승 1번, 성적도 괜찮았다. 미련도 있고, 나 자신에게 부족한 면이 있기도 했지만 운이 참 좋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동열식의 야구’ ‘선동열식의 리더십’이 부정당한 거 아닌가.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세상이 바뀌었구나 하는 자괴감 같은 것은 없나.

“어떻게 보면 팬들한테 소외감도 느껴지고. 내가 뭘 잘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있고…. 일단 쉬고 싶다.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누구나 사회생활이 순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번 일도) 인생 공부가 되지 않을까 한다. 뒤에서 보면 (야구가) 더 잘 보인다니까 야구 공부도 좀 더 하고. 다음에 어느 팀 감독을 맡아서 할 때는 더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 걸 안 당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웃음).”

―원래 긍정적인가.

“긍정적이지 않으면 이 피 말리는 세계에서 스트레스 때문에 못 산다.”

―선 감독이 지향했던 ‘지키는 야구’와 ‘화끈한 야구’를 지향하는 삼성 스타일이 좀 안 맞았던 거 아니었느냐는 얘기도 있다.

“삼성이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지만 우승을 못했다. 내가 팀 코치를 하면서 내린 결론은 공격만 생각했지 수비 쪽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공격 야구’가 보기는 좋을지 몰라도 승부의 세계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1등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수비가 강해야 되고 투수력이 강해야 한다. 아무리 홈런을 쳐내도 10점 내고 11점 뺏기면 끝 아닌가.”

―작년 한국시리즈 결승 때 SK에 4연패해 ‘너무 맥없이 졌다’ ‘근성이 없다’는 비판도 있었다.

“우리 선수들이 의외로 매우 잘해줬다. 그래서 2위까지 간 거다. 플레이오프 때 두산하고 5차전까지 가면서 좋은 경기를 보여줬고. 근데 하루 쉬고 바로 SK하고 경기를 했을 때 우리 전력으로 SK를 이길 수는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젊은 선수들에게 한국시리즈 경험을 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절대 부담 안 줬다. 져도 좋다, 내가 책임진다고 했다.”

―우승이 최고라고 하지 않았나.

“2009년 1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긴 했지만 바로 재계약을 하고 5년을 위임받은 상태여서 장기 전략을 짜고 있었다. 2009년, 팀에 부상 선수가 많아 5위를 했는데 무리를 했으면 4위까지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수를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9년에 무리했더라면 작년에 2위 성적을 못 냈을 거다. 지금 생각해도 잘 참았다.”

―돈을 좀 주고라도 좋은 선수들을 데려오면 금방 승부를 볼 수 있지 않나.

“내가 감독 되면서는 FA(자유계약선수)는 한 명도 안 데려왔다. 전부 자체 내에서 키웠다.”

―이유는….

“‘돈으로 해결한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았다. 또 감독으로서 선수를 잘 키우는 게 제일 뿌듯한 거 아닌가.”

―모든 것이 돈으로 통하는 세상 아닌가.

“물론 돈은 중요하다. 더구나 프로 선수는 돈하고 연관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선수 생활 때나 지도자 생활 때나 ‘더 달라’ ‘얼마 올려 달라’ 이런 소리 한 적이 없다. 모든 것을 구단 뜻대로 따랐다.”

―돈 욕심이 없나.

“하하. 나도 사람인데 왜 없겠나. 근데 돈이라는 게 꼭 갖고 싶다고 해서 가져지는 게 아니다. 남이 나를 인정해서 받는 돈이 진정한 돈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 대놓고 항의하는 사람이 많은데 남 탓하지 않고 어떻든 후임 감독 취임식까지 참석해 무리 없이 바통을 넘겼다.

“그게 남자답다고 생각한다.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 않다. 선수 생활 때도 늘 좋은 모습으로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임사에서 호남 출신으로 대구 팬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일부에서는 이번 일이 삼성의 호남색깔 지우기 아니냐는 말도 있다.

“그건 오해다. 국경이 없는 세계무대를 지향하는 글로벌 기업이 그렇게 했을 리 없다. 대구 팬들에게 감사한 것은 진심이다. 7년 있으면서 정도 많이 들었다. 처음 대구에 갔을 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일본에서 뛰던 첫해를 떠올렸다. 말도 안 통하고 국적도 다른 나라에서 설움을 많이 받았는데 같은 나라 안에서 지역 때문에 힘들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운도 좋았던 게, 첫해 감독을 맡자마자 우승을 했다. 성적이 좋으니까 안티 팬도 줄더라.”

―지역감정 같은 것은 없었나.

“별로 느껴보질 못했다. 물론 SK팀이 원정 왔을 때 이만수 수석코치 환영 플래카드 걸어놓는 팬들 보면 섭섭한 마음이 들긴 했다. 하지만 격려해주고 사랑해주는 팬들이 더 많았다. 나는 호남의 선동열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선동열이라고 생각한다.”

―김응용 전 사장은 만났나.

“통화했다.”

―뭐라고 하던가.

“‘왜? 왜?’ 하시다가…. ‘고생 많이 했다’ 하시더라.”

―김 전 사장과의 인연이 각별한데….

“워낙 무뚝뚝하시다. 선수 때도 1년에 한 3번 정도 얘기했을까. ‘수고했다’는 말도 한 3번 들었나(웃음). 내가 코치할 때도 말씀이 별로 없으셨다. 가끔 한마디씩 ‘오늘 투수 교체 타이밍이 너무 늦었어’ 정도? 내가 감독 되고 나서도 내 방에 오시는 게 1년에 한 번 정도였다. 그때도 ‘불편한 거, 도와줄 거 없냐, 소신 있게 해라’ 그게 전부였다. 내가 떠날 때보다 ‘우리 사장님’ 그만뒀을 때가 더 안타까웠다.”

―리더는 때로는 가혹해야 하는데 좋은 선배에서 냉정한 지도자로의 변신은 어땠나.

“사복 입었을 때와 유니폼 입을 때가 180도 다르다고 생각하면 된다.”

―경기할 때 말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을 거의 안 한다. 나를 보고 너무 매몰차고 정이 없다고도 한다. 근데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 때로 경기가 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이 되었을 때 나도 당황하지만 그걸 티 내서도 안 된다. 감독이 흔들리면 선수 전체가 무너진다.”

그에게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보급 투수’라는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작은 칭찬에도 얼굴이 빨개지고 머리를 긁적였다.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도 선 감독 이름과 얼굴은 다 안다. 그야말로 국민적 스타다. 어떻게 보면 탄탄대로, 일류의 길만 걸어와 오만해질 수도 있는데….

“스타라는 거는 남들이 인정해 줘야 스타지, 내가 잘났다고 생각해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부모님께서 항상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 ‘선수 선동열’보다 ‘인간 선동열’이 되라고 하셨다.”

―위로 형이 한 분 계셨는데 일찍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나보다 다섯 살 위였는데 백혈병이었다.”

―그 일이 특별히 정서적으로 영향을 끼쳤나.

“성격이 많이 변했다. 내가 원래 천방지축, 망나니였다(웃음). 나밖에 모르고. 근데 형이 죽고 책임감이 확 몰리면서 형 몫까지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야구의 매력은….

“글쎄….”

‘스포츠공학’적인 답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뜻밖의 답이 나왔다.

“‘부모’와 같다. 선수 땐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지도자 생활을 하니까 할수록 어려운 게 야구였다.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항상 나를 좋은 쪽으로 인도해 주셨듯 내겐 야구가 그렇다. 배움에 끝이 없다.”

―후배들에게 늘 강조했던 말이 있다면….

“적은 먼 데 있는 게 아니고 가까운 데 있다. 바로 자신이다. 나한테 지면 남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관이 있다면….

“두 가지다. 인간이 먼저 되자는 것과 적을 만들지 말자는 것.”

―종교가 있나.

“천주교다. 유아 영세를 받았다. 선수 시절 겉으로 표시는 안 했지만 마운드에 올라가면 늘 용기와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이제 시간도 많아졌으니 성당 열심히 다닐 거다.”

“모든 일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면이 있겠다”고 하자 그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를 만나고 나오는 길, 문득 미국의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이 ‘이미지와 환상’이란 책에 쓴 구절이 떠올랐다. ‘스타는 다른 사람의 만족을 따르지만 영웅은 신념과 용기라는 내면의 자기 힘을 따른다.’ ‘국보’ ‘야구 영웅’이라는 말을 들어온 선 감독이 진정 영웅으로 느껴졌던 것은 그 때문이다. 지난해 말 전격적이었던 그의 경질을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학살’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그도 피고용인의 한 사람이니 해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웅에게 걸맞은 사회적 대접과 예의도 필요한 법이다. 더구나 영웅이 흔치 않은 시대 아닌가.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선동열 전 감독은…
‘무등산 폭격기’서 ‘나고야의 태양’까지 亞 최고투수로


광주 송정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광주일고 시절인 1970년대 말 초고교급 투수로 이름을 알렸다. 고려대 2학년 때인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주역으로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다. 1985년 연고팀 해태에 입단한 후 11년 동안 불같은 강속구와 현란한 슬라이더를 무기로 꿈의 ‘0점대 평균자책점’을 세 번이나 기록했다. MVP 3번, 평균자책점 1위 8번, 다승왕 4번, 탈삼진왕 5번, 구원왕 2번 등 헤아릴 수 없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96년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뒤 ‘무등산 폭격기’에서 ‘나고야의 태양’으로 화려한 변신에 성공했다. 1999년 ‘정상에서 은퇴하고 싶다’며 전격 은퇴하고 재임기간 2년을 넘기기 힘들어 ‘감독들의 무덤’이라 불렸던 삼성을 2005년부터 맡아 6시즌 동안 지휘봉을 잡으면서 한 팀에서 통산 400승을 넘어서는 성공 가도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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