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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 읽기]부동산에 대한 절망적 집착

입력 | 2011-01-12 03:00:00

이불 펼 자리만 있어도 살 수 있는데···
왜 우리는 집이 없으면 불안할까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질 수 있다. 사람의 몸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의 마음을 가지기가 어려운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마음을 내게 보일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나름대로 확신할 수도 있다. 마음뿐만 아니라 시각적이지 않은 것들을 가지려면, 그것들은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시각화되어야만 한다.

귀로만 들을 수 있는 소리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어느 귀족의 만찬에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나타는 귀족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차를 나르는 시종이나 청소를 하는 시녀도 누구나 들을 수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피아노 소나타는 사적으로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이 될 수 없다. 연주자들이나 그들을 초청한 귀족이 자신이 연주하고 듣고 있는 음악을 시종이나 시녀가 듣지 않도록 만들 방법은 없다. LP나 CD는 이런 불만과 고뇌의 자식이었던 셈이다.

음반은 아름다운 음악을 시각화하여 소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당연히 음악 저작권이란 개념을 가능하게 만든 상품이다. 마침내 우리는 피아노 소나타를 소유하게 되었고, 오직 나만이 몰래 그것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음악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이어폰이 LP나 CD의 적장자일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 게오르크 지멜(1858∼1918)의 다음 이야기는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단지 가시적인 것만을 소유할 수 있는 반면에, 다만 들을 수 있기만 한 것은 현재 순간과 더불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리며 하등의 소유물도 보증하지 못한다. (…) 어느 한 공간에서 진행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밖에 없으며, 한 사람이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것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감각의 사회학(Sociology of the Senses)’

지멜의 통찰이 아름다운 음악에만 적용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청각 이외에 다른 감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들판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라벤더나 프리지어는 너무나 매혹적인 향내를 풍기는 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을 자기만 맡아야 한다고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 꽃들로부터 향을 추출해서 향수병에 담는 순간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꽃향기는 시각화되었기 때문이다. 시각 대상인 향수병을 통해 이제 냄새도 사적인 재산으로 변형된 것이다. 누구든 함부로 향수병 마개를 따고 그 향을 맡을 수는 없다. 향을 맡고 싶다면 우리는 향수병을 사야만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만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 즉 재산이 될 수 있다. 재산이 보통 동산(動産·movables)과 부동산(不動産·immovables)으로 구분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를 일이다. 움직이지 않음이나 움직임은 모두 시각적 범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LP나 CD의 음악을 자신과 무관한 다른 사람이 듣거나 혹은 자신이 가진 향수병에서 담긴 향내를 자신과 무관한 타인이 맡으려고 할 때, 소유욕이 강한 사람은 불편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자동차나 돈처럼 움직이는 재산은 아파트처럼 움직이지 않는 재산보다는 더 유동적이고, 그래서 소유욕이 강한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렇다. 자동차는 다른 사람이 만지거나 탈 수도 있고, 돈은 상품 구매로 타인의 손으로 넘어가거나 아니면 잃어버릴 수도 있다. 주식도 언제든지 폭락해 종이로 전락할 수 있다. 이것은 움직이지 않는 대상이 움직이는 대상보다 더 안정적인 시각 대상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 재산, 즉 부동산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한 가지 더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소유욕이 재산이 없을 때를 상정하는 불안감으로부터 증폭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불안감은 인간을 살벌한 생존 경쟁으로 내모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실 동산이든 부동산이든 언제든지 남의 소유로 넘어갈 수 있다는 예감처럼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영민한 발터 베냐민(1892∼1940)☆☆이 이런 사실을 간과했을 리 없다.

걱정(Die Sorgen)은 자본주의 시대에 고유한 정신병이다. 빈곤, 떠돌이-걸인-탁발승적 행각에서 정신적(물질적이 아닌) 탈출구 없음. (…) ‘걱정들’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했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

―‘종교로서의 자본주의(Kapitalismus als Religion)’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 노숙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노숙자는 대도시 서울의 익숙한 풍경 중 하나가 되었다. 과거 아파트로 상징되는 부동산이 부유함과 행복함의 상징이었다면 이제는 부동산은 단순한 허영의 대상이라기보다 생존의 바로미터, 즉 노숙자인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척도가 된 지 오래다. 이제 고가의 아파트가 문제가 아니라 전세나 월세로라도 부동산을 잠시나마 갖는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베냐민의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는 우리가 ‘걱정’이라는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걱정’은 “빈곤, 떠돌이-걸인-탁발승적 행각에서 정신적 탈출구가 없음”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미래의 삶에 대한 걱정은 언제든지 노숙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에 증폭된다는 것이다. 회사로 출근하고 그리고 집으로 퇴근하는 시간, 우리는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자들을 하나의 풍경처럼 바라보게 된다. 물론 애써 그것을 남의 일이라고 치부하며 우리는 갈 길을 재촉한다. 그렇지만 노숙자는 우리에게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언제든지 노숙자, 즉 집 없는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무서운 예감이 우리 내면을 찌르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미래에 펼쳐질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안과 근심이 걱정이란 정신병을 가중시킨다. 고가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파트인가 아니면 단독주택인가, 혹은 집주인인가 아니면 세 들어 사는 사람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노숙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걱정의 형식으로 우리 내면을 지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노숙자가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공동체가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특정 노숙자에 대한 사적인 관심과 애정이 존재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사적인 성격의 보살핌은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취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걱정과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노숙자라는 형식 자체를 없애야 하는 것 아닐까?

베냐민이 “걱정들은 공동체 차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했다는 불안”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역으로 말해 공동체의 차원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내 손에서 떠날 수 있는 부동산을 절망스럽게도 소유하려는 욕망의 이면에는 언제든지 자신도 노숙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렇지만 이런 절망스러운 소유욕 대신 공동체 차원에서 주거의 공포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우리에게 더 희망적인 것은 아닐까? 법정(法頂·1932∼2010)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이 스님이 죽은 뒤에도 우리를 깨우는 죽비소리로 남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지 모른다. 무소유를 달성되어야 할 개인적인 이상일 뿐이라고 단정하지는 말자. 무소유는 공동체적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내가 가지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가지겠다는 자비의 마음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무소유를 통해서 우리는 맹목적인 소유욕에서 벗어나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오직 이럴 때에만 우리는 노숙자라는 형식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는 공동체적 노력을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닐까.

2000여 년 전 장자(莊子)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방을 비우면 빛이 들어온다(虛室生白)”고. 방이 어둡고 좁아보였던 것은 사실 우리가 계속 사들인 소유물들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가재도구를 모두 치우고 보라.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넓은 방이 우리에게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이제 부동산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우리는 소유할 수 있는 것, 즉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게 될 것이며, 동시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타자와 함께함으로써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구입한 LP나 CD에서 아름답게 울리는 음악 소리를 타인이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끼는 삶, 혹은 내가 구입한 향수 냄새를 나와 무관한 타인이 맡고서 행복해한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는 삶! 이것이 과연 머나먼 이상에만 불과한 것일까?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빈곤과 걱정이 아니라 풍요와 안정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강신주 철학박사


보이는 것(the visible)☆

보이지는 않고 보고 있다고 상정되는 것은 우리를 압도하는 대상으로 경험된다. 신이나 귀신을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보이는 것은 원칙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 즉 자신의 지배하에 둘 수 있다. 시각이 법적이며 경제적인 층위를 갖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아가 시각이 가진 정치철학적 맥락도 매우 중요하다. 군주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행위는 스스로 보는 자가 아니라 보이는 자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처럼 보는 자가 보이는 자보다 정치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 그래서 그런지 하급자나 연소자가 자신의 눈을 직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불쾌감과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1892∼1940)☆☆

20세기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19세기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를 통해서 해소하려고 했던 독일계 유대 철학자. 자본주의를 정치경제학적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 차원에서도 다룬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 인문학의 주도적 경향인 문화연구를 창시했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미완으로 끝난 그의 연구는 그의 추종자 조르조 아감벤의 노력으로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로 출간되었으며, 저서로는 단일 논문으로 가장 많이 인용된 것으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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