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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신 PD의 반상일기]이창호〈강동윤〈윤준상〈이세돌〈이창호

입력 | 2011-01-12 03:00:00

물고 물리고… 영원한 천적은 없다




바둑 애호가라면 비슷한 기력의 천적이 한둘씩은 있다. 천적만 만나면 흐물흐물 모양이 무너지고 자기 바둑을 두지 못한다. 어쩌다 판맛을 보지만 치수고치기나 내기가 걸린 큰 판에서는 꼭 진다. 회심의 필살기를 연구해 가면 책에 없는 변칙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마주 앉는 순간 어느새 주눅이 들고 만다. 그 순간 승부는 이미 기울어 있다.

프로바둑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승부사들의 생존 경연장이라 천적 관계는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바둑리그에서 이창호 9단은 강동윤 9단만 만나면 승률 제로다. 2006년부터 오더제를 채택한 바둑리그에서 모든 팀은 한 시즌에 두 번씩 맞붙는다. 5명의 순번을 제출하기 때문에 같은 기사끼리 계속 만날 확률은 낮다. 그러나 둘은 이번 시즌까지 5년간 10번의 팀 대결에서 7번이나 대국을 벌이는 희귀한 인연을 보여줬다. 7번의 대결에서 강 9단이 모두 이겼다. 이 9단에게 강 9단은 ‘재앙’에 가까운 존재다.

일방적인 관계로 보이지만 정글 같은 승부세계 전체로 시야를 넓히면 꼭 그렇지도 않다. 최근 4년간의 전체 기전 상대전적에서 이 9단은 강 9단에게 7승 16패, 강 9단은 윤준상 8단에게 1승 4패, 윤 8단은 이세돌 9단에게 8전 전패, 다시 이세돌 9단은 이창호 9단에게 6승 8패로 서로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을 이루고 있다.

천적이란 승부세계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프로들은 늘 천적에 시달린다. 천적으로부터의 자유야말로 새해마다 꿈꾸는 모두의 한결 같은 바람이다.

괄목할 성적으로 2010년을 생애 최고의 해로 만든 기사가 박정환 원성진 9단, 허영호 8단이다. 셋의 공통점은 2010년 이전에 모두 천적 극복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박 9단을 괴롭힌 천적은 중국의 천재 천야오예 9단이었다. 박 9단은 한중 천원전 우승으로 지긋지긋한 4연패의 늪을 빠져나왔다. 원 9단은 입단 후 10년 가까이 이세돌이라는 큰 산 앞에서 하염없이 시름했으나 2007년 이후 6승 3패로 우위를 보였다. 허 8단은 윤준상 8단에게 1승 6패였으나 이젠 다 따라잡았다.

천적을 넘어서지 못하면 전진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뼈저리게 절감했을 것이다. 천적에게 위축되지 않고 끝내 대등한 승부를 벌이는 자만이 대기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하나 둘 천적을 극복하는 과정이 바로 일류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99%가 실력, 1%가 정신력. 기량이 비슷하기에 승부는 1%에서 갈린다.” 한게임을 2010 한국바둑리그 정규시즌 1위로 이끈 ‘올인’의 승부사 차민수 감독이 밝힌 포스트시즌 임전 소회다. 천적은 내 마음속에 먼저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반전무인(盤前無人)의 경지 앞에 영원한 천적이란 없다.

이세신 바둑TV 편성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