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인연(?) ‘야구 때문에 생긴 일’
야구사랑 못말려. 사랑에는 희생이 뒤따른다. 때로는 뼈 아픈 대가도 치러야한다. 그래도 좋은 건, ‘야구이기 때문’이다. 야구장을 찾아 환한 표정으로 응원 삼매경에 빠진 여성팬들. 스포츠동아DB
포스트시즌 티켓을 구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조용한 교실에서 선생님 몰래 야구 중계를 듣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집 밖에서도 야구를 챙겨 보기 위해 최신 휴대전화를 구비하는 건 기본. 소개팅남 옆에서 무심코 ‘본능적인’ 단어를 내뱉는 실수도 겪곤 한다. 이 모두가 야구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미스 베이스볼’ 참여자 여덟 명이 들려주는 ‘야구 때문에 생긴 일’. 열혈 야구팬이라면 대부분 겪어봤음직한, 생생한 경험담이다.
그런데 운 좋게도 교수님이 딱 1시50분에 휴식 시간을 주신 거예요. 도서관 컴퓨터까지 10분 거리를 3분 만에 주파했고, 1시59분59초에 블루 지정석을 클릭한 후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결제하기’를 눌렀죠.
그런데 그 때 ‘결제에 필요한 시스템을 설치하라’는 창이 뜨는 거예요. 학교 컴퓨터라 미처 생각을 못한 거죠. 결국 제가 선택한 좌석은 다른 분 손으로…. 흑흑.
그 다음 날은 1교시 수업이 있는데도 새벽 4시에 취소표가 풀린다는 얘기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어요. 하지만 그 시간 홈페이지 화면에 뜬 건 ‘점검 시간입니다. 오전 7시에 복구 예정입니다’라는 글. 또 3시간을 기다려야 했죠. 저처럼 취소표 기다리는 분들과 위로(?)의 인사를 나누면서요.
그런데도 결국 예매한 건 외야석뿐. 퀭한 눈으로 수업에 들어간 보람이 없었어요. 하지만 우리 선수들이 최고의 명승부를 보였잖아요! 아쉬움이 싹 사라져 버렸어요.
목이 터져라 응원 또 응원, 앗, 갑자기 전화가 쇄도
TV에 내얼굴 고스란히, 거짓말 들통나 버렸죠
-롯데팬 박현수: 야구, 그리고 롯데라는 팀을 좋아하면서 행복한 일들이 많았어요. 가장 중요한 건,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쌓게 되고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만들었다는 거죠.
언젠가 일을 핑계로 부산에 내려가 친구들과 야구장에서 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중계 화면에 잡히는 바람에 휴대전화에 불이 날 정도로 지인들의 연락이 쇄도했던 기억이 나요.
나중에 그 장면이 한 스포츠뉴스의 ‘여성 관중 급증’이라는 꼭지에 다시 한번 사용돼서 지상파 TV에서 제 얼굴을 보게 되는 일도 있었죠.
2009년에는 4강 진출 여부가 걸린 경기가 진행될 때, 제가 영화 촬영 중이었거든요. 주연 배우 분들을 비롯해 대부분이 롯데팬이라서 다같이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휴대전화로 야구 중계를 보면서 열심히 응원했던 기억도 나요.
-LG팬 송주현: 사실 야구를 보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퇴에 휴가에 ‘이미 돌아가신 분 한 번 더 고인 만드는’ 원시적인 방법까지 안 써 본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지난 시즌에는 반차와 월차를 고이 모아 뒀다가 야구장 가는 날 열심히 몰아서 썼죠. 한 번은 회사를 조퇴하고 아는 동생과 목동 구장에 가서 신나게 응원했는데, 경기가 끝난 후 바로 뒤에 앉아 계시던 어머님들께서 ‘아가씨 애인 있냐’며 연락처를 물으시는 거예요.
같은 사무실 동료인 남자 직원도 LG의 열혈팬이니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하시면서요. 재미있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멍청하게 서 있었죠.
그런데 아뿔싸! 그 분이 지갑에서 꺼내신 명함이 바로 제가 다니는 직장의 명함인 거예요! 그 순간 ‘야구장 때문에 조퇴한 게 걸리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받자마자 “연락 드릴게요”를 외치고 도망쳐 나왔어요. 이 글 보신다면, 연락을 못 드린 이유가 따로 있었으니 오해 없으시길 바랄게요.
아! 그리고 대구에서 열린 지난해 올스타전 때는 특별석에서 제 앞자리에 앉으신 대구시장님 일행 중 한 분이 너무 시끄럽다고 한 마디 하신 적도 있어요. 그래서 “팔짱 끼고 보실 거면 집에서 TV 보세요!”라고 말씀드렸죠. 호호호.
-한화팬 구율화: 학창 시절 장래 희망이 ‘야구 캐스터’였어요. 하지만 프로야구 중계는 공중파 3사에서 거의 담당하고 있었고, 그것도 모두 남자 아나운서들의 전유물이라 여자 야구 캐스터는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죠.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기분이었지만 포기할 수 없어서, 방송 3사의 사장님과 스포츠국장님 앞으로 꾸준히 이메일을 보냈어요. 절 캐스터로 채용해 달라고요.
어찌나 절절했는지 결국 한 방송사의 스포츠 국장님께서 전화하셨어요. 도대체 누군데 이렇게 끈질기게 이메일을 보내는지, 너무 궁금하셨대요.
결국 방송사 사회부 기자가 되고 나서도 스포츠국으로 가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어쩌다 스포츠국 선배들을 만나면 부러워서 눈물이 다 나더라고요.
지금도 전 행여 이벤트성으로라도 중계방송을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 나름대로 열심히 대비를 하고 있어요.
PMP에 지나간 중계방송을 다운받아 들으면서 혼자 중얼거리며 연습도 하고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제가 그토록 꿈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야구의 힘인 것 같아요.
-삼성팬 김빛나: 고3 수험생이었던 2002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월드컵이 끝나고 겨우 마음을 다잡아 공부에 매진하려 했더니, 삼성 야구가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오는 거예요.
오후 11시까지 학교에서 자율 학습을 해야 했으니, 영어 듣기 연습을 핑계로 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중계를 들을 수밖에요. 한 번은 이승엽 선수의 끝내기 홈런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는 바람에 조용한 교실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어요.
또 한여름 일요일 대낮에 야구장에서 일사병으로 쓰러졌다가, 관계자가 교복을 보고 학교에 연락을 해서 다음날 ‘라이언킹 이승엽’ 플래카드를 들고 벌을 서기도 했죠. 학교에서도 두 손 두 발을 다 든 ‘야구광’이었다고나 할까요.
대입 수능시험 한 달쯤 전에는 엄마가 저를 몰래 사직 구장에 데리고 가시기도 했어요.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결승전이 열렸거든요.
“빛나가 사라졌다”는 선생님의 전화에 “제가 데리고 도망쳤어요”라고 당당히 말하던 엄마의 모습에 학교에서는 ‘모전여전’을 외쳤대요. 히히히.
이렇게 전 야구 덕분에 다른 친구들보다 스트레스 덜 받는 고3 시절을 보냈답니다. 저도 나중에 수험생 부모가 되면 아이를 학원 대신 야구장으로 보내지 않을까요?
시즌땐 스케줄 재조정, 제 시계 야구 따라 돌아
연고 하나 없는 광주, 참 뻔질나게 내려갔죠
초면의 팬과 죽이 척척 ‘길바닥 자장면’ 못잊어
-KIA팬 김은경: 모든 팬들이 다 그렇겠지만, 저 역시 야구 때문에 1년에 절반은 영상 매체를 달고 사는 것 같아요. 일이 조금 늦게 끝나서 1회부터 못 볼 것 같으면 아예 사무실에서 인터넷으로 중계를 다 보고 퇴근해요. 일찍 집에 오면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요.
야구 때문에 휴대전화까지 스마트폰으로 바꿨다니까요. 그 전에는 전화만 제대로 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장소를 불문하고 중계를 볼 수 있는 DMB 기능이 필요했거든요.
일단 시즌 때는 모든 스케줄이 경기 일정에 따라 결정돼요. 주말에 지방 경기(특히 광주)가 있으면 꼭 가게 되고요. 저는 광주에 연고가 전혀 없는데, KIA팬이 되면서 광주 갈 일이 생긴 거죠.
팬들끼리 모여 야구장 앞마당에서 자장면도 시켜 먹고…. (정말 우리나라 대단해요. 길에서도 자장면 배달이 되다니!) 혼자 야구 볼 때는 몰랐는데, 작년 팬카페에 가입하면서 여러 가지 좋은 경험을 한 것 같아요.
같은 팀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여서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야구 여행도 가고, 또 이렇게 ‘미스 베이스볼’ 인터뷰도 하게 됐잖아요.
고대하던 야구장 데이트, 앗, 어이없는 에러…발끈
홧김에 ‘쌍시옷’ 터져, 아! 물건너 갔구나…
요즘엔 카메라 들고, 홀로 야구장 지키죠 ㅎㅎ
-넥센팬 황선하: 전 소개로 만난 남자분과 야구장에 갔을 때가 떠올라요. 그 분도 야구를 좋아하신다고 해서 두 번째 만날 때 동행했거든요. 야구장이 덥고 시끄러워서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래도 함께 간다는 게 어디에요? 나름 분위기도 괜찮았어요. 그날 따라 바람도 솔솔 불었고요.
그런데 문제는 경기였죠. 타선이 너무 물방망이라서 화가 확 났거든요. 게다가 정말 어이없는 에러가 하나 나온 거예요. 그 순간 옆에 누가 있는 지도 잊어버린 채, 평소에 TV 보던 습관대로 ‘쌍시옷’이 들어간 단어를 내뱉어 버렸어요.
물론 한 3초 후 상황을 파악하고 굳어 버렸죠. ‘아, 이 소개팅은 물 건너갔구나.’ 당황해서 경기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집에 왔어요. 그런데 더 놀랐던 건, 그 분에게 계속 연락이 왔다는 거예요. 하지만 오히려 제가 너무 민망해서 연락을 슬슬 피하고 말았어요.
요즘은 그냥 카메라 들고 혼자 야구장에 다녀요. 예전에 손승락 선수에게 투구폼 합성한 사진을 드린 적이 있는데, 그걸 정민태 코치님과 함께 보면서 분석하시는 걸 봤거든요. ‘내 사진도 도움이 될 수 있구나’ 믿고 싶어진 거죠. 전 사랑스러운 70GB짜리 사진 폴더와 카메라, 그리고 야구와 평생 함께 할 거예요. 아, 치킨과 맥주는 추가요!
-SK팬 박다해: 2009년 가을·겨울에 잠시 미국에서 공부를 했어요. 그 때 한국 시간에 맞춰 야구 보느라 고생 좀 했죠. 그 해 막바지에 우리 팀이 KIA랑 정규 시즌 1위를 다퉜잖아요. 게다가 딱 제가 출국한 직후부터 19연승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야 했죠.
또 미국은 한국보다 인터넷이 느리니까, 기숙사에서 노트북 컴퓨터로 보면 도중에 툭툭 끊겨요. 그래서 꼬박꼬박 24시간 개방되는 도서관 컴퓨터실에 가서 야구 보고 아침 먹는 게 일과였어요. 항상 그 시간쯤 컴퓨터실을 청소하시던 아저씨와 친분까지 쌓았죠.
한국시리즈 때도 기가 막혔어요. 7차전까지 갈 줄 모르고 미리 여행을 예약해 뒀는데, 하필이면 날짜가 겹친 거예요. 하는 수 없이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 중계 부탁을 했고요.
여유 있게 이기고 있다는 얘기에 안심하고 잠들었다가 이상한 악몽을 꿨는데, 나중에 ‘끝내기 홈런 맞고 졌다’는 비보에 얼마나 좌절했던지…. 아직도 TV에서 그 장면이 나오면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외치며 눈부터 가려요. 흑흑.
정리|배영은 기자 yeb@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