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무대에 서면 ‘빛’이 보인대요”
11일 오후 서울 예술의 전당 국립발레단 연습실에서 이은원 씨가 포즈를 취했다. 이 씨가 입은 무릎 훨씬 아래 길이의 풍성한 튀튀는 ‘지젤’에서 발레리나들이 입는 로맨틱 튀튀다. 김재명 base@donga.com
11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국립발레단 연습실. 피아노 연주가 흐르는 가운데 2월 24∼27일 공연되는 ‘지젤’ 주역무용수들의 연습이 진행되고 있었다.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 김주원 씨 뒤로 새로운 얼굴이 눈에 띄었다. 발레리나 이은원 씨(20)다.
2시간에 걸친 연습이 끝난 뒤에도 이 씨는 연습실을 떠날 줄 몰랐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자는 말에도 “잠깐만 동작 한 번만 더 맞춰보고요”를 연발하며 파트너를 붙잡았다.
작년 7월 인턴단원으로 입단해 9월 ‘라이몬다’에서 군무로 처음 국립발레단 무대에 섰다. 12월 초 ‘백조의 호수’에서는 솔리스트인 스페인 공주를 맡았다. 12월 말 ‘호두까기 인형’에서 주인공 마리 역으로 첫 주역 데뷔했다. 군무에서 주역까지 걸린 기간은 단 3개월.
“여덟 살 때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저도 발레 하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랐어요. 아빠는 딸 몸을 남자들이 그렇게 막 만지게 할 수 없다고 반대하셨다는데 제가 단식투쟁을 하면서 고집을 피워 어쩔 수 없이 하라고 하셨대요.”
취미로 시작한 발레는 예원학교를 거쳐 2007년 고교과정을 생략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조기 입학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중국 상하이국제콩쿠르 주니어 2등, 2008년 불가리아 바르나국제콩쿠르 주니어 3등에 오르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즐겁기만 했던 발레가 힘들어진 것은 그 뒤부터였다.
“조기 입학을 해서 동기들이 모두 서너 살 많은 언니 오빠들이었어요. 지금도 또래 친구가 별로 없어요. 2학년 말이 되면서는 욕심만큼 발레도 늘지 않고, 어릴 때부터 발레만 하느라 제가 못해본 것들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안달병’이 나서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고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학교로 돌아와 재활훈련을 시작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훨씬 편했다. 그리고 1년 반, 낭만발레의 대명사 ‘지젤’에 주역으로 설 기회를 얻은 것이다.
소감을 묻자 이 씨는 “고개를 숙이게 된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아, 정말 예쁘다. 아름답다’ 하며 최고로 동경해오던 작품이었는데 막상 직접 해보니 너무 어려워요.” 함께 주역으로 서는 김주원 김지영 씨는 이 씨가 처음 발레를 시작하던 무렵부터 주역으로 활약하던 대선배이다. 이 씨는 “같이 주역으로 무대에 선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하겠다. 그냥 보고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만 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장점을 묻는 질문에도 그는 손부터 내저었다. “전 그냥 다 보통인 것 같아요. 아직 노력해야 할 점이 너무 많아요. 신경 안 쓰면 팔이 자꾸 뒤로 뒤집어지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도 고쳐야 하고, 안쪽 근육을 강화해야 하고, 손가락 끝까지 에너지 보내는 것도 아직 잘 안되고….” 재차 캐묻자 그때서야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한마디 한다. “제 얘기가 아니고요. 주원이 언니가 그러시는데 제가 무대에 서면 ‘빛’이 있대요. 중요한 거라고 하셨어요.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진짜 아니고요….”
이제 갓 스무 살, 프로 무용수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큰 역할을 맡게 된 그는 인터뷰 내내 ‘부담’이나 ‘초조’ 같은 단어는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예전엔 무슨 일이 있으면 굉장히 조급해하는 편이었어요. 지금은 너무 달려가지 않으려고 해요. 큰 목표를 세우기보다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하나씩 해내며 천천히 쌓아나가야겠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