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납북된 이후 최은희의 1984년 모습. 당시 북한 개풍의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 쌍묘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스포츠동아DB
때론 배우들의 삶은 그들의 영화만큼 극적이다. 그중 이 여배우만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도 없을 듯하다.
배우 최은희. 열여덟의 나이에 연극 ‘청춘극장’으로 연기를 시작한 뒤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지나며 한국영화계 최고의 여배우 자리에 등극했다.
1950년 전란의 포화 속에서 남편인 고 신상옥 감독과 만나 사랑한 뒤 결혼과 이혼, 또 재결합 등 굴곡진 개인사를 겪어냈다. 그녀가 신감독과 함께 만들어 ‘성춘향’, ‘열녀문’, ‘빨간 마후라’, ‘이조잔영’ 등의 작품을 배출한 신필름은 현재 영화계 제작 시스템의 원조격으로 꼽힌다.
납북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6년의 시간이 지난 1984년 4월2일. 이날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 김정일의 지령에 따라 사전 계획에 의해 두 사람이 납북됐다”면서 “1977년 8월 홍콩에서 암약하던 북한 공작원 이상희 여인이 9월 하수인인 신필름 홍콩지사장 김규화를 시켜 영화 브로커인 중국인 왕동일을 매수하여 최은희를 홍콩으로 초청해 납치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최은희는 1978년 1월14일 오후 5시에 강제 납치돼 북한 공작선편으로 납북됐다. 신상옥 감독 역시 김규화로부터 1월27일 최은희의 실종 소식을 전해듣고 홍콩으로 날아간 뒤 미국과 일본, 동남아와 프랑스 등을 돌며 최은희를 찾았지만 7월14일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뒤 19일 납북됐다.
이후 두 사람은 북한에서 ‘돌아오지 않은 밀사’, ‘소금’과 ‘탈출기’ 등 영화를 제작했다. 최은희가 납북될 당시 남포항에 김정일이 ‘마중’을 나왔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북측의 관심은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1986년 3월13일 베를린 국제영화제 참석을 틈타 파리를 거쳐 오스트리아에서 일본 교도통신 기자 등과 함께 미 대사관을 통해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