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열하는 지중해의 태양이 떠오르는 시칠리아는 그 어떤 와인 산지와도 구분되는 토양과 기후를 갖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유럽의 와인 호수’라 불릴 만큼 저급 와인 산지에 지나지 않았다. 이탈리아 안에서도 경제적으로 낙후된 이곳 주민들이 와인 품질을 중시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 시칠리아의 천혜의 자연환경을 알아본 자본과 기술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시칠리아 와인의 환골탈태가 시작됐다. 한편에선 이 지역 토착 포도 품종에 내재된 장점을 부각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고, 다른 한편에선 카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 같은 국제적인 품종들이 시칠리아 토양에 빠른 속도로 안착했다.
최근 시칠리아가 ‘이탈리아의 캘리포니아’라는 별명을 얻게 된 데에는 이 땅의 환경에 빠른 속도로 적응한 샤르도네의 공헌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파인애플향을 중심으로 퍼지는 과일향은 빼어난 후각을 가진 훈련된 시음가가 아닌 일반인의 코에는 캘리포니아나 호주의 샤르도네로 혼동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네로 다볼라는 시칠리아 와인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소개되는 품종으로 앞으로도 지금의 위상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네로 다볼라와 비슷한 맛을 내는 품종으로 시라를 꼽는다. 맛은 비슷한지 몰라도 이 품종은 재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아서 이탈리아 본토의 여러 지방에서 가능성을 보고 재배를 시도했지만 성공 소식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품종은 칼라브레세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모니카 벨루치가 열연한 영화 ‘말레나’는 어느 정도 숙성된 네로 다볼라 100%로 만든 와인을 홀짝이며 봐야 할 것 같다.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아름다운 선율은 더없이 좋은 안주다.
김혜주 와인칼럼니스트
● 이번 주의 와인
두카 엔리코